“만델라의 나라가 이 지경까지…” 남아공 LG공장은 왜 불탔나

중앙일보

입력 2021.07.15 15:00

지난 12일(현지시간) 남아공 더반의 상점에서 물건을 약탈해 가는 시민들.[AP=연합뉴스]

지난 12일(현지시간) 남아공 더반의 상점에서 물건을 약탈해 가는 시민들.[AP=연합뉴스]

“아파르트헤이트(흑ㆍ백 분리 정책) 종식 이후 최악의 위기” “넬슨 만델라의 나라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제이콥 주마 전 대통령의 투옥을 계기로 폭동ㆍ약탈이 일주일 넘게 이어지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사태를 외신들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주마 전 대통령의 고향인 콰줄루나탈에서 시작된 소요 사태는 북부 하우텡주 요하네스버그까지 번졌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14일(현지시간)까지 최소 72명이 사망했고, 1300명 가까이 투옥됐다.

실업률ㆍ코로나가 불지핀 폭동 사태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 최대 위기"

소요 사태 속 200개 이상 쇼핑몰이 약탈의 대상이 됐다. 더반 소재의 LG전자 공장은 전소됐고 삼성전자 물류센터도 피해가 컸다. 현지 교민 이광전씨는 14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공급 창고란 창고는 전부 습격 대상”이라며 “피해도 심하지만, 상점을 새로 채울 물건이 없어 생필품 구입 자체가 힘든 상황”이라고 전했다. 생필품 사재기를 막으려 1인당 구매 개수를 제한하면서 상점 앞에는 긴 줄이 생겼다.

남아공 더반의 LG전자 공장에서 제품 약탈하는 군중 [교민 제공, 연합뉴스]

남아공 더반의 LG전자 공장에서 제품 약탈하는 군중 [교민 제공, 연합뉴스]

그러나 이번 사태를 불러온 주마 전 대통령은 13일 “감옥에서 나갈 때까지 평화는 없다”는 옥중 메시지를 냈다. 소요 사태 장기화가 우려되는 대목이다.

소도시는 경찰 인력이 모자라 주민들이 자체 무장을 하고 민병대를 꾸렸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분노한 흑인들과 총으로 무장한 백인 자경단의 모습은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유혈 사태를 떠오르게 한다고 전했다.

아파트르헤이트는 과거 남아공 백인 정부의 인종 분리 및 차별 정책을 말한다. 1994년 첫 평등선거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지도자였던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며 종식됐다.

이번 시위를 이끈 건 주마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지만, 일부 시민들이 너도나도 약탈에 가담하며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주마 정권(2009년~2018년 집권)의 높은 실업률, 권력층의 부정부패에 최근 코로나 확산까지 겹친 탓”이라고 분석했다.

①청년 실업률 46% 역대 최고치

남아공의 정치분석가 랠프 마테크가 박사는 WP에 “약탈 현상을 범죄로만 보는 것은 너무나 쉬운 선택”이라며 “이 문제의 사회·경제적 뿌리를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6000만 인구의 절반이 빈곤에 놓여있고, 역대 최고치를 찍은 청년 실업률이 근본에 있다는 설명이다.

남아공 통계청의 지난달 4일 발표에 따르면 올해 1분기(1~3월) 전체 실업률은 32.6%에 달했다. 15~34세 청년 실업률은 46.3%나 된다. 젊은이들 태반이 무직이란 얘기다. 마테크가 박사는 “왜 약탈에 가담하는 젊은이들이 이렇게 많은가? 그들이 직장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폐기됐지만 빈부 격차는 종식되지 않았다. 남아공의 소도시마다 도심부에는 부유한 백인과 아시아인들이, 외곽에는 흑인 빈민층이 형성돼 있다. 텔레그래프는 콰줄루나탈주의 북부 호윅시에서 줄지어 생필품을 챙겨가는 흑인 빈민들을 묘사하며 “연민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고 전했다. 이들이 값싼 담요 몇 장으로 탐나는 물건을 맞바꾸거나, 약탈한 알루미늄 시트지로 아기의 머리에 빗물이 떨어지지 않게 가려준다면서다.

14일(현지시간) 남아공 더반시의 불타는 창고 옆에서 약탈을 하고 있는 사람들. [로이터=연합뉴스]

14일(현지시간) 남아공 더반시의 불타는 창고 옆에서 약탈을 하고 있는 사람들. [로이터=연합뉴스]

②코로나가 구조적 문제 악화

세계은행 분석에 따르면 코로나19 확산은 빈자들을 더욱 가혹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전염병으로 남아공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고임금 노동자에 비해 4배나 많은 실직을 겪었다고 한다. 팬데믹이 남아공의 구조적인 경제 문제를 악화시킨 셈이다.

코로나 확진자 수는 연일 늘고 있다. 미 존스홉킨스대 집계에 따르면 14일 기준 6만 5595명이 사망했고, 223만여 명이 확진됐다. 남아공의 확진자 수가 전체 아프리카 대륙의 35% 가량을 차지한다. 반면 백신을 한 번이라도 접종한 인구는 전체의 6.7%(한국 약 30%)로 낮은 편이다.

여기다 이번 소요 사태로 백신을 보급할 약국ㆍ병원마저 제대로 기능하지 못 할 수 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혼돈’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무슨 일이.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혼돈’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무슨 일이.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③만연한 부정부패와 무너진 법질서도 영향

무장한 시위대 등 폭력 행위는 주로 주마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도하고 있다고 한다. 요하네스버그 비트바테르스란트대의 윌리엄 귀메데 교수는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상층부의 법 질서 무시가 이번 사태를 불러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주마 정권 하에서 대통령과 그의 정치적 동맹들은 수 조 랜드(남아공의 화폐 단위)를 훔치고 약탈하면서도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며 “윗선의 약탈이 이제 풀뿌리 단계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제이콥 주마 전 남아공 대통령. 2009년부터 2018년까지 집권했다. 각종 부정부패 혐의로 조사를 받던 중 법원의 명령을 어겨 지난달 구속됐다. [AP=연합뉴스]

제이콥 주마 전 남아공 대통령. 2009년부터 2018년까지 집권했다. 각종 부정부패 혐의로 조사를 받던 중 법원의 명령을 어겨 지난달 구속됐다. [AP=연합뉴스]

15개월형을 받고 지난 7일 수감된 주마 전 대통령은 만델라 전 대통령과 흑백 차별 반대 운동을 펼쳤던 인물로, 남아공 원주민 집단인 줄루족의 정치적 영웅으로 꼽힌다. 정작 대통령 집권 기간엔 무기거래 관련 뇌물수수ㆍ돈세탁ㆍ사기와 같은 부정부패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10년의 임기 동안 의회에서 8차례 불신임 투표에 부쳐졌지만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번 수감도 그의 집권 시기 의혹을 조사하기 위한 부패조사위원회에 출석하라는 법원의 명령을 어긴 혐의(법정모독)가 적용됐다. 그의 입장을 대리해온 주마 재단은 "인권 운동가이자 정직한 정치가를 법원이 정당한 절차 없이 가뒀다"며 정치 탄압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남아공 더반에 있는 삼성전자 물류센터에 화재가 발생한 모습. 한 트위터 유저가 찍어 13일(현지시간) 공개했다. [트위터 갈무리]

남아공 더반에 있는 삼성전자 물류센터에 화재가 발생한 모습. 한 트위터 유저가 찍어 13일(현지시간) 공개했다. [트위터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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