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일대 교수의 경고 “능력주의가 공정하다고? 속임수일 수도”

중앙일보

입력 2021.07.15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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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대니얼 마코비츠 예일대 로스쿨 교수는 능력주의의 지나친 강조를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사진 예일대

대니얼 마코비츠 예일대 로스쿨 교수는 능력주의의 지나친 강조를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사진 예일대

“능력에 따라 철저하게 사회적 계급이 나뉘는 2034년 영국 사회. 능력을 측정하는 기준은 ‘지능(IQ)+노력(Effort)’이다. 시험에서 IQ 125를 넘긴 상위 5%는 엘리트 계급으로 인정받고, 나머지 95%는 엘리트에게 고용되는 하인으로 전락한다. 출신 학교와 직장에 따라 신분은 철저하게 계층화된다.”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1959년 쓴 풍자소설 『능력주의(The Rise of the Meritocracy)』의 줄거리다. 당시 ‘능력’은 계층을 구분 짓는 요소로 처음 등장했다. 조지 오웰의『1984』나 올더스 헉슬리의『멋진 신세계』처럼 디스토피아를 다룬 공상과학(SF) 소설인데, 반 세기도 더 지난 지금 세계 곳곳에서 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능력주의는 가문이나 혈통이 신분을 결정짓는 귀족주의(Aristocracy)의 부당함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공정의 가치’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 또한 완벽하지 않다.

지난 20년간 미국의 능력주의를 연구한 대니얼 마코비츠 예일대 로스쿨 교수는 중앙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능력주의는 공정하고 건전한 가치임을 표방하지만, 현실에서는 엘리트에 속하지 못한 중산층의 박탈감을 가속화하고 엘리트 계층마저 끊임없이 능력을 착취당하는 구조를 만든다”며 “능력주의가 공정하다는 주장은 자칫 ‘속임수’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음을 울렸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능력이 뛰어나다’는 주장을 앞세워 본인의 입맛에 맞거나 가까운 인사들을 요직에 앉힌 게 단적인 예다.

그는 저서『엘리트 세습(The Meritocracy Trap)』에서 현대 사회가 ‘능력주의 덫’에 빠졌다고 주장하며 “엘리트 계층은 과거 귀족처럼 자신의 지위나 권력을 활용해 계급을 자식에게 물려주려하고, 결과적으로 능력주의가 오히려 사회 이동을 억제하는 요소로 변질됐다”고 지적했다. 비록 국가별로 제도와 문화의 차이가 있지만, 마코비츠 교수를 통해 ‘진정한 공정’을 갈구하는 한국 사회가 나아갈 길을 고찰해 봤다.

마코비츠 교수의 저서 The Meritocracy Trap(왼쪽)과 번역서 '엘리트 세습'. 사진 각사

마코비츠 교수의 저서 The Meritocracy Trap(왼쪽)과 번역서 '엘리트 세습'. 사진 각사

한국 사회가 높은 교육열과 함께 능력주의를 강조하는 이유는 뭘까.  
한국과 미국은 엘리트 교육을 매우 중요시하는 국가다. 이는 대학의 서열을 강조하는 문화에서 드러난다. 다만 한국은 부모의 학벌이 자녀에게 세습되는 경우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적은 편에 속한다. 미국보다 엘리트로 가는 진입장벽이 높지 않다는 얘기다.
한국도 사교육 비중이 높아지면서, 부모의 경제력이나 학벌이 자녀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능력주의가 공고화되면 세습의 가능성이 커진다는 지적을 하고 싶다. 능력주의 세계에서 계층을 대대손손 물려주고 싶은 엘리트가 끊임없이 특권을 구축하려 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버드대와 예일대 재학생 중 소득 상위 1%에 속하는 가구 출신이 하위 50% 가구 출신보다 더 많다. 능력주의 시대에 엘리트는 갈수록 자녀 교육에 재산뿐 아니라 에너지(각종 방법)를 쏟아붓는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당선 이후로 공정과 능력주의가 이슈로 떠올랐다. 오종택 기자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당선 이후로 공정과 능력주의가 이슈로 떠올랐다. 오종택 기자

『엘리트 세습』의 추천사를 쓴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2016년 정유라 이화여대 특혜에 이어 2019년 조국 사태, 2020년 인천국제공항 논쟁 등으로 들끓는 민심이 특권 배제와 공정을 요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미국식 능력주의와 다르게 한국의 능력주의는 동아시아식 입신양명 개념에 가깝다”며 “‘합격주의’ 혹은 ‘시험주의’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한국 정치권에서도 능력주의가 화두다.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느냐가 관건이다. 제대로 된 이해 없이 능력주의의 긍정적인 면만 부각하면 거짓된 희망을 심어줄 수 있다. 특히 정치권에선 기존 부패한 세력을 비난하면서 비(非) 엘리트층의 분노를 교모하게 부추기는 기회주의자, 선동가들이 판칠 수 있다.  
거짓된 능력주의의 예를 든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 귀족주의 시대의 불평등이 부당하다고 공감한다. 반면 능력에 따른 불평등은 효율적이고, 정당하다고 여긴다. 나아가 빈곤은 게으름의 결과이고, 부와 명예는 근면성 덕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낳는다.  
부와 명예를 위해 노력하는 건 긍정적이지 않나.  
무한 경쟁, 승자 독식, 결과만 따지는 지나친 능력주의가 문제다. 능력주의는 역사상 정점에 올랐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 실리콘밸리, 월스트리트 등은 엘리트끼리 야망을 겨루는 격전지가 됐다. 엘리트는 기술 발달과 번영의 촉진자로 여겨지면서 과거 귀족보다 더욱 공고한 계층을 형성했다. 소득·부·권력뿐 아니라 산업을 지배하고 영예 개인적인 존경까지 독점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선 ‘능력’이 과연 공정한 지 따지는 게 관건이다. 
지난 50년간 미국에서 중산층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감하면서 불평등 논쟁에 불을 지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지난 50년간 미국에서 중산층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감하면서 불평등 논쟁에 불을 지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마코비츠 교수는 자신도 능력주의자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예일대·런던정치경제대·옥스퍼드대·하버드대 등 유수의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러다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과 꼭 닮은 예일대 제자들을 보면서 능력주의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됐다. 그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소위 승자라고 하는 엘리트도 집단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며 “입시에 성공했지만, 졸업 후 직장에서도 경쟁하며 지금까지의 시련을 끊임없이 되풀이할까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엘리트의 처지를 ‘화이트칼라의 소금광산’이라고 표현했는데.   
오늘날 젊은 투자은행(IB) 간부는 통상 오전 6시 출근해 주당 80~120시간 일한다. 한 애널리스트는 1주일에 155시간 근무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잠자는 시간을 포함해 개인 시간이 일주일에 고작 13시간이었다는 얘기다. 은행원에게 ‘9시 출근, 5시 퇴근’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아침 9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를 뜻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업무량은 노동자의 수요, 즉 능력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들은 심지어 바쁘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업무 시간이 늘어난 이유가 능력주의 때문인가.  
그렇다. 부모의 재산을 교육의 형태로 증여받은 엘리트는 인적 자본으로 먹고산다. 귀족들이 물려받은 땅을 임대하고 여가를 즐기던 것과 다르게 엘리트는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착취해 부를 일궈야 한다. 그들이 엘리트 지위를 유지하려면 다른 사람이 인정하는 기량을 개발하기 위해 훈련을 멈추지 않고 자신의 교육 수준과 노동력을 쉴 새 없이 관리해야 한다.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1959년 쓴 'The Rise of the Meritocracy'는 지난해 '능력주의'라는 제목으로 번역서가 출간됐다. 사진 각사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1959년 쓴 'The Rise of the Meritocracy'는 지난해 '능력주의'라는 제목으로 번역서가 출간됐다. 사진 각사

능력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이 있나.  
만약 귀족주의와 능력주의 중에 선택하라면 능력주의가 낫다. 하지만 또 다른 세 번째 방법이 있다. 시험과 같은 유일한 잣대로 모두의 능력을 줄 세우지 않고, 각자의 다른 능력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좋은 일자리’와 ‘좋은 대학’의 정의가 다양해져야 한다. 모두가 월스트리트 금융사 간부와 같은 피라미드 꼭대기를 향해 달려갈 필요는 없다. 선생님·의사·전기공·배관공 등 각자가 공동체에서 필요한 일자리를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사회가 이를 편견없이 인정하는 분위기로 갈 때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삶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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