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상언의 시시각각

아프간의 실패, 한국의 기적

중앙일보

입력 2021.07.15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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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미군 철수로 텅빈 카불 인근의 바그람 공군기지. 지난 2일의 모습이다. [AFP=연합뉴스]

미군 철수로 텅빈 카불 인근의 바그람 공군기지. 지난 2일의 모습이다. [AFP=연합뉴스]

‘이 전쟁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낡은 헬기를 타고 불안하게 힌두쿠시산맥을 넘으며 마음속으로 내내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서울에서 짐을 쌀 때부터 품었던 의문입니다. 20년 전 아프가니스탄 내전 취재 때의 기억입니다.

스스로 돕지 않은 아프가니스탄
20년 전의 예감대로 여전히 비극
한국인의 위대한 여정 실감케 해

미국은 탈레반 정권이 알카에다를 지원해 아프간이 그들의 배후 기지가 됐다며 반(反)탈레반 세력인 북부동맹이라는 무장 조직을 지원했습니다. 2001년 9·11 테러에 대한 일종의 보복이자 테러 위험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로부터 무기와 자금을 지원받은 북부동맹은 공격 개시 한 달여 만에 수도 카불을 점령했고, 탈레반은 남부로 도주하며 게릴라전을 벌였습니다.

북부동맹의 카불 점령 직후인 11월 23일 그곳에 당도해 취재를 시작하자 아프간의 보통 사람들에겐 이 전쟁이 의미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발소마다 문전성시를 이뤘습니다. 턱수염을 깎으러 온 사람들이 줄을 섰습니다. 면도를 마친 사람들은 수염 기르기를 강제한 탈레반 정권을 욕했습니다. 보건전문학교에서는 부르카를 쓰지 않은 아프간 여성들의 민얼굴을 처음으로 봤습니다. 그들은 학교에 다니게 된 것에 환호했습니다. 탈레반은 여성은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고 여학생의 등교를 막았습니다. 방송국에선 장비 점검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탈레반은 TV 방송을 금지했습니다. 그렇게 자유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나라의 장래가 밝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카불 도착 6일 뒤인 29일에 임시정부 청사로 가 임시 외교부 장관 인터뷰를 시도했습니다. 담당 직원이 이미 10여 곳이 신청했다며 이틀 뒤에 오라고 했습니다. 오라는 날에 다시 갔는데 같은 말을 또 했습니다. 저와 함께 다니며 통역하던 현지인이 제 소매를 붙잡고 한적한 곳으로 이끌고 가 100달러만 달라고 했습니다. 돈을 건넸고, 그가 담당 직원 사무실에 다녀왔습니다. 두 시간 만에 장관 인터뷰가 이뤄졌습니다. 부패는 곳곳에서 목격됐습니다. 도주한 탈레반 고위 관리들이 살던 집은 으리으리했습니다. 토굴이나 움막에 사는 시민은 부지기수였습니다.

 ‘10여 일 동안 카불에 머물며 아프가니스탄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수염이 짧다고 사람들을 매질하던 탈레반 정권이 사라진 것은 기뻐했지만 9년 전 세력 쟁탈전을 벌이며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던 북부동맹의 군벌들이 다시 권력을 쥔 것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군벌과 주변 국가의 욕심, 종교로 포장된 강압 통치, 그리고 열강의 독단·독선 모두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침묵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작전명인 ‘불굴의 자유’나 ‘무한 정의’는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비극은 계속될 것이다.’ 카불을 떠나는 날 중앙일보에 쓴 ‘취재일기’의 일부입니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국제적 재건 지원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어디론가 다 새어나갔고, 탈레반 소탕도 미군에만 의지하다 실패했습니다. 20년이 흘렀는데 최빈국 상태 그대로입니다. 국민소득, 영아 사망률, 부패지수 모두 전 세계 최하위권입니다. 결국 미국도 손을 털고 나가기로 했습니다. 대사관 경비 병력 수백 명만 남은 상태입니다. 그들도 곧 귀국합니다. 이제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은 시간문제입니다.

아프간에 비교해 보면 한국전쟁 이후의 한국 역사는 기적입니다. 굴곡이 있었고 여전히 많은 과제를 안고 있지만 전·후례를 찾기 어려운 발전입니다. 낡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광복회장과 대선 주자가 그 여정을 아무리 깎아내리려 해도 보통 사람들의 삶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아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국민의 헌신, 희생, 노력이 만든 결과입니다. 자학(自虐)의 엉터리 역사관을 전파하지 마십시오.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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