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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선진국 지위’ 격상에 걸맞게 국제사회 역할 확대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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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오영주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장

오영주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장

유엔 주최 회의에 참석하면 77그룹(G-77) 회의를 공지하는 안내문을 자주 접하게 된다. 국제회의 참석 경험이 없을 경우 G7(주요 7개국)의 오타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G-77은 개도국의 정부 간 협의체 명칭이다.

한국, UNCTAD 설립후 첫 ‘선진국’ #타국과 차별되는 선진국 지향해야

1964년 6월 15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 참석한 77개 개도국은 유엔 무대에서 선진국에 대한 협상력을 높일 목적으로 ‘77개국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이 선언에 따라 유엔회의에서 개도국의 단일대오를 형성하고 공동 입장을 개진하는 개도국 그룹으로 G-77이 창설됐다. 이후 가입국이 꾸준히 늘어나 현재 134개 개도국이 참여하고 있지만, 1964년 창설 당시의 정신을 존중해 여전히 G-77 명칭을 고수하고 있다.

G-77과 한국의 관계는 매우 깊고 또 특수하다. 1964년 한국은 ‘77개국 공동선언’에 참여하고, G-77 창설 회원국으로 이름을 올렸다. 선진국 진입을 지향하던 한국은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고, 이듬해 4월 G-77과의 지속적인 협력 의사를 밝히면서 탈퇴한다. G-77과의 33년간 관계를 스스로 정리한 것이다.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 사례였다.

지난 2일 G-77을 탄생시킨 UNCTAD가 한국의 소속을 ‘개도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하는 결정을 채택했다. 유엔 회원국들이 공식적으로 한국을 선진국 그룹의 일원으로 승인했다는 차원에서 의미가 크다. G-77을 탈퇴한 지 24년 만이고, UNCTAD 설립 이래 최초 사례다.

한국은 지난 5월에는 ‘녹색성장 및 2030 글로벌 목표를 위한 연대(P4G)’ 정상회의를 개최했고, G7 정상회의에는 최근 2년 연속 초청받았다. 그만큼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역할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가와 기대가 한층 높아진 시점에 이뤄진 이번 선진국 승인 결정이기에 의미가 더 크다. 이제는 명실상부한 선진국 그룹의 일원으로서 한국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할 때다.

어떤 선진국이 될 것인가에 대한 한국사회의 담론 형성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우리의 국력과 위상은 국제적 수준이 되었는데 여전히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 속에 시선을 가두고 있지 않은지 먼저 되짚어 봐야 한다. 한국사회의 당면한 문제뿐만 아니라 국제사회가 공동으로 직면한 글로벌 주요 현안에 대한 한국의 이해와 관심 제고가 시급하다.

선진국 그룹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인 대외원조와 관련해서도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 한국의 공적개발원조(ODA)가 지속해서 확대되고 있지만, 지원받는 개도국의 사정보다 지원하는 한국의 작은 단기적 이익을 더 중시하지는 않는지 자성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원조는 다른 선진국과는 차별적인 지향성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한때 원조받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외원조가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중시해야 할 이유다. 개도국의 어려운 사정을 이미 경험한 한국이 그들의 새로운 성공 스토리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원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통해 한국이 얻게 될 국제적 위상과 평가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선진 한국의 큰 자산이 될 것이다.

선진국 한국의 모습은 현재 진행형이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역할과 책임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기회도 창출될 것이다. 임시정부 주석을 역임한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은 일찍이 우리나라가 남을 모방하는 나라가 아닌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는 나라,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실현하는 나라가 되길 소망했다. 선진국 대한민국의 여정에 나침반이 되는 혜안이다. 선진국 그룹 승인이란 기분
좋은 소식을 들으며 백범 선생의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를 찬찬히 다시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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