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중앙시평

복지국가의 문턱에서 만난 기본소득

중앙일보

입력 2021.07.13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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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홍석철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홍석철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삶의 질에 대한 경제학의 관심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근대경제학을 개척한 알프리드 마셜은 1890년 『경제학 원리』에서 경제학은 ‘웰빙(wellbeing)의 물질적 요건을 획득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 개인과 사회의 활동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였다. 웰빙의 개선을 경제학의 궁극적 목적으로 두었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웰빙은 삶의 질, 복지, 생활수준, 행복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경제학자들은 웰빙 측정 지표들을 끊임없이 개발해왔고, 그 지표의 장기적인 변화를 분석하면서 웰빙의 결정요인과 정책을 연구해왔다.

웰빙 개선은 경제정책 최우선 목표
비물질적 조건의 중요성 유념해야
기본소득으로 삶의질 개선 어려워
복지서비스 확대해야 복지국가

오늘날 한 국가의 웰빙 측정에 가장 많이 쓰이는 지표는 1940년대 사이먼 쿠즈네츠의 국민소득 개념에서 발전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다. 높은 삶의 질을 영유하기 위해 소득 등 물질적 조건뿐만 아니라 건강, 환경, 사회관계 등 비물질적 조건이 중요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도 1인당 국내총생산이 주요 지표로 자리 잡은 것은, 정량화가 쉽고 비물질적 조건들과의 상관성이 높기 때문이다. 매년 거시 경제 성과를 국내총생산의 성장률로 평가하는데, 성장률은 우리 국민의 평균적인 삶의 질이 얼마나 향상되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이후 소득 지표만으로 삶의 질을 측정하는 것이 미흡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물질적 조건만을 중시한 정책은 삶의 질의 다른 조건을 간과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례로 1974년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은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할 소득 수준이 넘어가면 행복은 소득에 비례하여 증가하지 않는다는 역설을 실증적으로 제시하였다. 이런 논의를 거치면서 경제학의 관심은 소득을 넘어 건강, 환경, 교육 등 삶의 질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이는 높은 삶의 질을 보장하고자 하는 선진국의 복지국가 구현 목표와도 결을 함께 한다. 또한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하기 힘든 사회 문제에 대한 정부 개입이 커진 계기가 되었다.

소득재분배는 소득 이전을 통해 계층 간 소득 격차를 줄이기 위한 대표적인 복지 정책으로 기초연금, 각종 수당, 사회보험, 조세정책 등을 포함한다. 요즘 정치권의 화두인 기본소득제는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소득 격차를 해소하여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기본소득제가 도입되면 우리의 삶의 질은 북유럽 수준이 될 수 있을까? 2020년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소득이 증가할수록 삶의 만족도가 높아지는 것은 뚜렷이 관측되지만, 월 소득 300만 원 이상에서는 소득 간 만족도 차이는 거의 없었다. 이를 토대로 볼 때, 기본소득의 삶의 질 개선 효과는 저소득층에서만 나타나고 타 복지정책에 비해 효율성이 크게 낮을 것이다.

국가 간 비교에서는 소득과 삶의 만족도 사이에 약한 상관성이 관측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최신 통계를 보면, 이스라엘, 체코, 칠레, 멕시코 등 한국보다 1인당 국민소득은 낮지만 삶의 만족도가 높은 국가들이 여럿이다. 소득은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지만 필수조건이 아니라는 교훈을 준다. 국가 간 소득과 삶 만족도의 선형관계를 활용해보면, 연간 300조 원의 재원을 확보해서 전 국민에게 매월 50만 원씩 기본소득을 지급한다 해도 삶에 만족하는 비율은 현재 60%에서 북유럽 수준인 80%에 이르지 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낮은 삶의 질은 소득 격차 해소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300조 원은 올해 보건·복지·고용 예산의 1.5배에 달하는 재원인데, 이를 부족한 복지서비스 확충에 쓰는 것이 삶의 질을 높이는 더 효과적인 방법이다.

얼마 전 경기연구원 조사에서 국민 10명 중 8명이 기본소득제 도입을 찬성하고, 찬성자 다수는 삶의 질 개선을 기본소득제 도입의 이유로 꼽았다고 한다. 현금 복지를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만약 같은 재원으로 국민 각자가 원하는 양질의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찬반을 물었어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진정한 복지는 윤택하고 안락한 삶 유지에 필요한 공공재를 생산하여 적재적소에 제공하는 것이다. 쾌적한 사회환경과 자연환경을 보장하고, 건강한 삶을 도모하고,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고, 충분한 일자리를 확보하고, 기본적인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 진정한 복지이다. 이런 복지서비스는 시장에서 생산되지 않거나 높은 시장 가격 때문에 기본소득으로 구매하여 충족시키기 어렵다.

OECD의 ‘더 나은 삶의 질 지수’ 순위에서 한국은 40개 조사국 중 30위로 평가되었다. 환경문제, 사회적 관계, 건강 수준, 삶의 만족도, 일과 삶의 균형 영역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초라한 성적이다. 소득 양극화 해결도 중요하지만, 이런 문제들을 개선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의 질은 복지국가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복지국가의 기본 조건을 갖추지 못한 채 무리하게 기본소득 도입을 추진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그럴 재원이 마련된다면 미흡한 삶의 조건부터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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