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영준의 시시각각

'해방전후사'로부터의 해방

중앙일보

입력 2021.07.13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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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가 7일 경기 파주의 한 스튜디오에서 열린 대선 후보 정책 언팩쇼에서 정책발표를 하고 있다. [파주=뉴스1]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가 7일 경기 파주의 한 스튜디오에서 열린 대선 후보 정책 언팩쇼에서 정책발표를 하고 있다. [파주=뉴스1]

“우리 근현대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라고 말한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더 구체적으로 풀어 말했다. “조선시대 세도정치로 나라를 망친 노론 세력이 일본 강점기에 친일 세력이 되고, 해방 이후 반공이라는 탈을 쓰고 독재 세력이 되고, 한 번도 제대로 된 청산을 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여전히 기득권으로 남아 있다.”(2017년『대한민국이 묻는다』) 그러면서 말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문재인 정권이 그토록 적폐 청산에 올인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 연장선에서 “정조대왕이 돌아가시고 1800년 이후에 제대로 된 개혁 민주세력이 집권한 건 딱 10년밖에 없었다”(이해찬)는 독선과 ‘20년 집권론’이 나온다.
 이런 역사인식은 은연중 퍼져 있다. 언젠가 택시기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지금 한국 상류층의 2대, 3대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친일파 아닌 사람을 찾기 힘들다고 하대요. 그러니 우리 같은 사람 뼈 빠지게 일해도 밑바닥 신세 벗어나기 어려운 거라요.” 초면인 사람과 정치 논쟁은 피하는 게 좋다는 경험칙을 어기며 내 의견을 말했다. “꼭 그렇게 볼 건 아니지요. 대한민국처럼 역동적인 사회 변동을 겪은 나라가 지구상에 어디 있습니까. 맨손으로 내려와 판잣집 생활부터 시작한 피란민의 아들이 대한민국 대통령 아닙니까.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재벌들도 2∼3대 거슬러 올라가면 그저 그런 집안 아닌가요. 오히려 지금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무너지고 있는 게 문제죠.”
 대선 주자 가운데 한국 사회의 역동성을 증명해 주는 사람이 이재명 경기지사다. 그런 그가 대한민국을 ‘깨끗하지 못한’ 나라로 자학(自虐)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그는 대선 출마 선언과 함께 “친일세력과 미 점령군의 합작으로 깨끗하게 출발하지 못했다.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생각으로 새로 출발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만일 그가 집권한다면 어떤 정책을 펼칠지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이재명 지사와 문재인 대통령이 닮은꼴이라고 하면 양측 지지자들 모두 핏대를 올리겠지만, 발언에서 드러난 역사인식은 차이가 없다.
 이런 유의 역사인식을 접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1980년대를 풍미한『해방전후사의 인식』(약칭 해전사)이다. ▶‘미군=점령군, 소련군=해방군’이란 프레임이나 ▶북한은 철저히 친일 청산을 한 반면, 남한에선 친일파가 득세했고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북한식 토지개혁에 비해 남한은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을 택함으로써 기득권을 온존시켰다는 인식이 여기서 출발했다.
『해전사』가 나름대로의 역할을 한 점은 분명히 있다. 반공을 국시로 삼던 냉전 시절에는 지금과 반대의 의미에서 균형있는 역사관을 갖추기란 불가능했다. 『해전사』는 금기의 영역을 허뭄으로써, 당시 흔히 쓰던 표현으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586세대는 이 책을 탐독하며 국정교과서에서 가르치지 않았던 사실들에 빠져들었다. 엄혹했던 시절 나름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해전사』가 6권으로 완간된 것은 1989년이다. 그 직후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소련 기밀문서들을 통해 우리는 진실에 보다 더 가까이 접근하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성과들을 통해  ‘해방전후사에 대한 인식’을 온전하게 가다듬을 수 있었다. 역사인식은 그렇게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고, 그런 인식의 변화들이 쌓이면 또 한번 발전의 밑거름이 된다. 사회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철학적 기반인 변증법의 원리대로다.
 안타깝게도 권력의 주변에는『해전사』에서 역사인식의 진화를 멈춘 사람이 많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우리 정치·사회에 영향력이 큰 사람들이란 점은 안타까움을 넘어 우리 모두의 불행이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해전사』는 무오류의 교범이자 신화가 돼버렸다. 언제까지 우리는 해방전후사의 속박에 갇혀 있을 것인가.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깨끗하지 못한 나라" 이재명 발언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남긴 유산
80년대에서 멈춘 역사관 극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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