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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정책의 선의와 무능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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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경제·산업디렉터

서경호 경제·산업디렉터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善意)로 포장돼 있다더니, 정말 그랬다. 국민의 삶을 책임지겠다고 선언했던 문재인 정부의 좋은 뜻이 시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례가 너무 많았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대표되는 소득주도 성장은 자영업자에게 직격탄을 날렸고, 호기롭게 시작했던 ‘비정규직 제로’ 정책은 공공기관을 노-노 갈등으로 몰아갔다.

서울 전셋값은 106주 연속 오름세 #친노조 정책에 임시직 OECD 2위 #선의의 정책 거듭 실패는 무능탓

치솟는 주택가격과 전셋값을 잡으려 했던 부동산 정책은 이제 더 이상 손쓰기조차 힘들어질 정도로 작동 불능 상태다. 세금 올려 집값 때려잡겠다고 나섰지만 부실한 공급대책 탓에 번번이 실패했다. 다락같이 오른 집값은 ‘벼락거지’를 양산했고, 생각할수록 우울해지는 ‘부동산 블루’ 신드롬을 낳았다. 한때 정부 출범 초기 수준으로 집값이 내려갔으면 한다는 희망 섞인 발언이 청와대에서 흘러나왔지만 이제는 그런 말도 쏙 들어갔다. 이미 집값이 너무 올라버려서다. 지금으로선 집값 거품이 서서히 빠지는 게 최선인데, 급격하게 가격이 내려가면 금융 시스템이 견뎌낼 수 없다. 집값 급락을 은행은 견뎌낼지 몰라도 제2금융권에선 곡소리가 날 것이다.

임대차보호법도 문제다. 1년 가까이 지났지만 전·월세 시장은 정상화되지 않았다. 서울 전셋값은 106주 연속 올랐다. 전세의 월세화는 갈수록 심해졌다. 지난해 상반기 서울 아파트의 임대차 거래 중 전세 비중은 71.3%였는데, 임대차법 시행 후 60%대로 하락했다. 보유세 부담에 오른 전셋값만큼 월세로 돌리는 집주인이 많아져서다. 매달 현금을 월세로 내야 하는 세입자의 주거비 부담만 커졌다. 전셋집이 귀하니 집주인의 세금 부담이 세입자에게 전가된 거다. 경제원론은 현실이 됐다.

지난해 7월 말 시행된 전·월세 상한제와 계약갱신청구권에 따라 2년 더 연장하는 권리를 행사한 세입자들은 내년 하반기 이후 시세대로 임대료를 내야 한다. 전·월세 가격이 오른 데다 물건마저 귀해졌으니, 집 없는 설움은 심리적 박탈감을 넘어 생활의 고통이 됐다. 차라리 임대차보호법을 폐지하라는 거친 주장까지 나오는 이유다.

서소문 포럼 7/13

서소문 포럼 7/13

임대사업자 정책은 또 어떤가. 현 정부 초기엔 김현미 당시 국토교통부 장관이 직접 나서 다주택자의 임대사업자 등록을 적극 권유했지만, 한순간에 정책 기조가 바뀌었다. 임대사업자는 집값 폭등의 주범이자 투기의 온상으로 몰렸고 지난해 7·10 대책에서 단기 임대(4년)와 아파트 매입 임대(8년) 제도가 폐지됐다. 여당은 한발 더 나아가 지난 5월 모든 주택 유형에 대한 매입 임대의 신규 등록을 받지 않고 양도세 중과 배제 혜택도 임대 말소 이후 6개월 이내 매각하는 경우에만 적용한다고 발표했다. 사실상 등록임대사업을 폐지하는 방향으로 가겠다는 거다.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국토부도 임대사업자 제도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고 밝히고 있어 남아있는 혜택마저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다주택자 규제를 강화하면서 임대사업자 등록을 권장하는 정책의 모순 때문에 스텝이 꼬여버린 건데, 다주택자가 밉다고 임대주택을 공급하는 임대사업자의 순기능까지 지워버리는 건 문제다. 어제 매일경제가 유경준 국민의힘 의원 자료를 분석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서울의 임대사업자는 KB부동산 시세보다 40% 가까이 싸게 전세 물건을 공급한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기준으로 임대사업자가 내놓은 전세가격이 서울은 시세의 63%, 경기도는 71%, 인천은 80%였다. 임대사업자는 임대 계약 전 금액의 5% 이내에서 임대료를 올릴 수밖에 없다. 다주택자의 ‘밉상’을 제거해야 전셋값 상승을 막는 고마운 완충재인 임대사업자의 ‘착한 얼굴’이 같이 보인다.

실직자·해고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한 개정 노조법은 노조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었다. 노조가 해고 노동자의 복직 투쟁에 나서면 기업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기존 일자리를 지키려는 노조의 강경 투쟁에 휩쓸리면 새 일자리가 나오기는 힘들다. 청년이 원하는 좋은 일자리는 생기지 않고 단기 공공일자리만 늘어나니 지난해 우리나라 임시직 일자리 비중(26.1%)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위라는 불명예를 얻은 거다. 취약층을 위한 적극적 일자리 정책과 노인 재취업의 결과라는 정부의 변명은 옹색하다.

선의의 정책이 의도하지 않은 불의의 결과로 귀착되는 건 시장의 힘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시장 만능주의를 설파하려는 게 아니다. 시장을 거스르는 오만을 경계하자는 얘기다. 정책의 선의가 반복적으로 뒤틀리는 건 충분히 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능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