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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굶고 있다” 코로나 신음 쿠바, 수십년 만에 반정부 시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11일(현지시간)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에 반발하는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AP=연합뉴스]

지난 11일(현지시간)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에 반발하는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AP=연합뉴스]

“자유! 자유!”

코로나에 관광업 직격탄, 생필품도 못사 #확진자 3만 2000명, 백신 접종률 15% #트럼프 복원한 제재 바이든 유지도 한몫 #올 4월 카스트로 사임 후 대규모 시위

11일(현지시간)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국회의사당 앞. 코로나19 확산 상황이 무색할 정도로 빼곡한 인파가 모여들었다. 마스크를 쓴 수 천명이 머리 위로 박수를 치고 구호를 외치며 정부를 비판하는 시위를 벌였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이날 쿠바 전역에서 최근 수십년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화난 표정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독재 타도”와 “자유”를 외쳤고, 트위터를 중심으로 ‘#비바쿠바리브레(자유 쿠바 만세)’‘#SOS쿠바 등의 해시태그가 물결을 이뤘다. 한 여성이 “우리 아이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다!”고 소리치는 영상도 SNS에 올라왔다.

아바나 남서부의 산 안토니오 데 로스 바뇨스 지역에서 시위대가 행진하는 모습이 페이스북에서 한 시간 가량 생중계 됐지만, 이후 삭제됐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북부 연안의 카데르나스와 중부 카마퀘이에선 수천명의 시위대가 공산당 간부 및 경찰차를 뒤집어 엎고 환호했다. 정부가 운영하는 고가품 판매 상점이 약탈당하기도 했다.

쿠바 북부 연안 마탄사스 지역의 카르데나스시에서 11일(현지시간) 분노한 시위대가 공산당 간부의 차량을 뒤집었다는 SNS 동영상이 확산하고 있다. [트위터 캡처]

쿠바 북부 연안 마탄사스 지역의 카르데나스시에서 11일(현지시간) 분노한 시위대가 공산당 간부의 차량을 뒤집었다는 SNS 동영상이 확산하고 있다. [트위터 캡처]

혼란이 이어지자 거리에는 기관총을 장착한 특수부대 차량과 후추 스프레이, 곤봉을 든 경찰들이 배치됐다. 또 사복 경찰들이 시위대 틈에 섞여 시민들을 폭행하거나 연행해갔다고 한다. 여기다 정부를 옹호하는 이들까지 시위에 합세하면서 현장에선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졌다.

미겔 디아스카넬 대통령은 이날 축구 경기를 끊고 긴급 송출된 TV연설을 통해 “쿠바인들은 미국 정부가 현재 상황의 주요 책임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며 “우리는 그 누구도 이 상황을 조작하지 않도록 할 것이며 전투 명령이 내려졌다”고 밝혔다.“쿠바의 거리는 (외부인이 아닌)혁명가들의 것”이라고도 했다.

FT는 미국의 경제 제재로 인한 장기적인 경기침체에 각국의 코로나19 봉쇄로 쿠바의 주요 수입원인 관광업마저 막히면서 민심이 폭발한 것이라고 전했다. 서민들의 생계가 끊긴데다 기본적인 의료ㆍ식료품을 사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는 게 일상이 됐다고 한다. 생계 불안이 체제에 대한 분노로 전환된 셈이다.

쿠바의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주말 기준 3만 2088만명의 확진자가 발생했고, 6923명의 신규 확진자가 나왔다. 이에 반해 백신 접종률은 인구의 15% 가량(한국은 약 30%)으로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반정부 시위대가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기념탑을 장악한 모습. [AP=연합뉴스]

반정부 시위대가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기념탑을 장악한 모습. [AP=연합뉴스]

NYT는 “반대 의견이 제한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시위는 흔치 않은 것”이라며 “1994년 8월 말레코나조 봉기 이후 정부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든 시위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옛 소련 붕괴와 미국의 금수조치로 인한 경기침체에 더해 나라 밖 이주를 봉쇄하려는 당국 조치에 반발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쿠바는 1959년 피델 카스트로 전 총리(국가평의회장)가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뒤 62년 간 피델ㆍ라울 카스트로 형제가 실권을 장악해왔다. 올해 4월 라울 카스트로가 89세의 나이로 공산당 총서기직에서 사임하며 ‘카스트로가(家) 시대’는 막을 내렸다.

지난 2018년 집권한 미겔 정부는 화폐 개혁 등 경제 개혁 조치를 시도했지만 여전히 깊은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고 FT는 지적했다.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간) 시위 사태에 긴급 TV 연설을 하는 모습. [쿠바 정부 트위터]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간) 시위 사태에 긴급 TV 연설을 하는 모습. [쿠바 정부 트위터]

쿠바는 오바마 정부 시절 미국과 관계 개선을 하는 등 경제 회복의 단초를 마련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쿠바에 대한 경제 제재를 복원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퇴임 직전인 올해 1월 쿠바를 재차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리기도 했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오바마 정부의 쿠바 정책 기조를 물려받을 것이란 관측이 한 때 제기됐지만, 지난 5월 국무부는 쿠바를 ‘대테러 비협조국’으로 유지했다. 트럼프 정부의 쿠바 제재를 유지하는 쪽에 무게가 실렸다. 큰 틀에서 중국과 러시아 등 공산권 국가들에게 강경한 입장을 취하려는 바이든 정부의 대외 정책 기조가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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