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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리고, 유감 표명…‘결례 배틀’ 반복, 지긋지긋한 한ㆍ일 투샷

중앙일보

입력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문재인 대통령의 도쿄 올림픽 계기 방일과 정상회담을 둘러싼 한ㆍ일 간 ‘결례 배틀’이 점입가경이다. 정상회담 의제와 형식을 조율하면서 사실상의 ‘최후통첩’이 등장하는 등 기존 외교 관례에 벗어나는 상황의 연속인데, 문제는 이런 양상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상회담 놓고 '최후통첩'까지 등장 #G7 계기 한ㆍ일 정상회담 무산 때는 #한국이 언론 흘리고, 일본이 "유감" #같은 상황 수차례 반복…불신 증폭 #양국 외교 한ㆍ일 관계 담당 실무진 #입지 좁아지고 적극성 잃는 결과로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1일 “일ㆍ한 정부가 정상회담을 이달 실시하는 것으로 조율에 들어갔다”며 “일본은 한국 쪽에 정상회담 개최를 수용하겠다고 했다”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 일본 교도통신은 정상회담 시간에 대해 “(주요 외빈)1인당 원칙적으로 15분 정도가 될지 모른다”는 일본 총리관저 소식통의 발언을 전했다. 문 대통령이 오더라도 다른 외빈과 마찬가지로 약식회담 정도만 할 수 있고, 특별대우는 하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외교부는 휴일인데도 이례적으로 오후 늦게 공식 입장을 냈다. 외교부 당국자는 “최근 양국은 현안 해결의 동력이 마련되고 적절한 격식이 갖춰진다는 전제 하에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한)정상회담 개최 가능성도 검토한 것은 사실”이라고 확인했다.

이어 “그러나 외교당국 간 협의 내용이 최근 일본 정부 당국자 등을 인용해 일본 시각에서 일방적으로 언론에 유출되고 있는 데 대해 강한 유감을 표한다”며 “이런 상황에선 협의가 지속되기 어렵다”고 했다.

일본 외무성 발표도 아닌 일본 언론의 보도에 외교부가 공식적으로 “강한 유감”을 표한 것도 통상적이지 않은데, “협의가 지속되기 어렵다”며 여차하면 판을 깰 수도 있다는 경고까지 한 것이다.

지난달 영국에서 열린 G7 정상회의 참석자들의 단체사진. 뉴시스

지난달 영국에서 열린 G7 정상회의 참석자들의 단체사진. 뉴시스

이는 지난달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뒤 벌어졌던 신경전과 판박이다. 언론에 흘리고, 유감을 표명하는 주체만 바뀌었다.

당시 G7 정상회의를 계기로 추진됐던 한ㆍ일 정상회담이 무산된 배경을 두고 한국 언론에서 외교부 당국자를 인용해 “일본 측이 독도 방어훈련을 문제 삼아 일방적으로 회담을 취소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자 일본 측에선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관방장관이 직접 나서 “사실에 반할 뿐 아니라 일방적인 주장을 한 데 대해 지극히 유감으로, 한국에 즉시 항의했다”고 반박했다.
외교는 쌍방이 해야 하는데, 서로 일방에 대한 비난만 난무하는 상황이다.

사실 비공개 협의 사안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고 이를 정부는 모른 척하는 식으로 상황을 유리하게 가져가려 시도하는 건 일본이 자주 써온 특유의 언론 플레이 방식이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 역시 같은 방법으로 대응하며 서로 선을 넘는 비방전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면서 양국 간 감정의 골과 불신이 깊어지며 관계 개선은 더욱 요원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는 양국의 외교 당국에서 한ㆍ일 관계를 담당하는 당국자들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실제 G7 정상회의 계기 정상회담 무산 뒤에도 한국 외교부와 일본 외무성의 담당 실무자들은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꽤나 애를 먹었다고 한다.

2019년 11월 김유근 국가안보실 1차장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여부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2019년 11월 김유근 국가안보실 1차장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여부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앞서 2019년 11월 한국이 한ㆍ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ㆍ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유예하며 한ㆍ일 간에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 해제를 위한 협의를 시작하기로 합의한 직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푸는 방향으로 논의하기로 합의해놓고선, 발표하면서는 그게 전제는 아니라는 식으로 말을 바꿨다. 일본 언론은 “일본의 퍼펙트 게임” 등으로 보도하며 이를 거들었다.

청와대는 맹공에 나섰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you try me(해볼 테면 해봐라). 계속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모른다”고 했고, 윤도한 국민소통수석은 일본 언론 보도를 ‘소설’에 비유했다.

이 과정에서 외교부는 “일본에 항의하자 일본 측에서 아키바다케오 외무성 사무차관 명의로 사과했다”고 했다.
물밑 소통 내용까지 공개한 것도 문제였지만, 당시 한ㆍ일 관계 개선을 목적으로 합의 타결을 위해 사실상 주도적 역할을 한 게 아키바 차관인데, 오히려 그를 특정해 망신주는 모양새가 돼버렸다.

일본은 당장 “사과한 적 없다”고 발끈했고, 애써 한 합의에 생채기만 남긴 채 이후 관련 협의도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지난해 3월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제8차 한일 수출관리 정책대화 영상회의 화면에 한국 수석대표 이호현 산업통상자원부 무역정책관(위)과 일본 수석대표 이다 요이치 경제산업성 무역관리부장이 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뉴스1

지난해 3월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제8차 한일 수출관리 정책대화 영상회의 화면에 한국 수석대표 이호현 산업통상자원부 무역정책관(위)과 일본 수석대표 이다 요이치 경제산업성 무역관리부장이 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뉴스1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철저히 대외비로 지켜져야 하는 정상회담 관련 물밑 논의 내용이 계속 공개되는 것 자체가 양국 정상이 만나도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며 “양쪽 모두 한ㆍ일 관계를 국내정치적 메시지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어 이런 왜곡된 상황에 놓인 것 같다”고 진단했다.

 또 “양국 간 외교 당국 실무진은 정부의 부침이나 정치적 상황과 상관없이 언제든 솔직하고 진솔하게 협의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돼야 하는데, 지금 같은 상황에선 불가능하다. 실무진들 역시 소극적으로 임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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