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년중앙] 판타지 속 판타지를 찾아서 42화. 호랑이

중앙일보

입력

가깝고도 위험한 존재···역사와 전설 넘나든 호랑이

무서워하면서도 숭배했던 존재인 호랑이는 이제 우리 일상에서 볼 수는 없지만, 이야기·영화·캐릭터 속에서는 여전히 친숙하게 볼 수 있다. Getty Images Bank

무서워하면서도 숭배했던 존재인 호랑이는 이제 우리 일상에서 볼 수는 없지만, 이야기·영화·캐릭터 속에서는 여전히 친숙하게 볼 수 있다. Getty Images Bank

오랜 옛날,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오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장터에 갔던 어머니가 돌아와 동생이 문을 열려고 했는데, 오빠가 말렸습니다. 왠지 몰라도 이상했기 때문이죠. 알고 보니 집에 온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호랑이였습니다. 호랑이는 떡장수인 어머니의 떡을 빼앗아 먹고 어머니까지 잡아먹은 것도 모자라 오누이까지 잡아먹으려 한 거죠. 호랑이를 피해 나무 위로 도망친 오누이. 하지만 호랑이는 오누이를 속여 나무에 올라가는 방법을 알아내고 뒤쫓기 시작합니다. 위기에 몰린 오누이가 하느님에게 도와달라고 소원을 빌자,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동아줄을 잡고 하늘로 올라간 오누이는 그대로 하늘의 해님과 달님이 되었고, 욕심을 부리던 호랑이는 떨어져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해님 달님』이라는 전래동화 줄거리입니다. 이 같은 이야기는 “옛날 옛적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는 말로 시작하죠. 호랑이가 정말로 담배를 피웠는지 아니면 먹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만큼 환상적으로 오랜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담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건 1618년 조선 광해군 때라 하니, 적어도 그보다는 훨씬 더 옛날을 나타내겠죠. 그런데 왜 하필 그런 옛날을 말할 때 호랑이가 나올까요? 우리나라엔 다른 동물이 얼마든지 있는데 말입니다. 『해님 달님』 같은 옛이야기에서 호랑이가 자주 등장하고, 그 이야기들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부터 시작하는 데는, 우리나라와 호랑이에 얽힌 여러 가지 사정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한국에서 가장 친숙한 동물 중 하나인데요. 자그마치 단군신화에서부터 등장할 정도죠. 신화 속에서 호랑이는 참을성이 부족해 곰에게 지고 말지만, 그만큼 친숙한 존재라는 거겠죠. 그 후에도 호랑이는 각종 이야기에서 볼 수 있고, ‘담배 피우는 호랑이’ 모습도 여러 그림에서 등장합니다. 옛이야기에서 호랑이는 신으로 나오는 용, 그리고 악당으로 나오는 뱀에 이어 3번째로 자주 나온다고 하죠. 흥미로운 건, 그들 호랑이의 모습이 이야기마다 다르다는 겁니다. 호랑이는 대개 『해님 달님』에서처럼 악당으로 나와 사람들을 해치지만, 때로는 착한 사람을 도와 악당을 물리치기도 하며, 나쁜 짓을 하려는 이들 앞에 나타나 꾸짖기도 합니다. 물론 호랑이가 얽힌 이야기 상당수는 호랑이에게 쫓기거나 피해를 본 주인공이 호랑이를 물리치고 영웅이 된다는 얘기로 끝납니다. 심지어 남편을 잃은 아내가 호랑이를 횃불로 잡아 죽이기도 하죠.

이야기 속에서 호랑이는 무서운 맹수로 나오곤 하지만, 한편으론 『해님 달님』에서 보듯 조금 멍청한 모습으로 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건 호랑이는 ‘영감을 지닌 존재’예요. 거대한 괴물이 되고, 인간으로 변하는가 하면, 신선으로서 도움을 주기도 하죠. ‘용호상박’이라는 말 그대로 호랑이는 용과 필적할 만한 존재였습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호랑이를 산군(山君), ‘산의 주인’이란 이름으로 부르며 신처럼 숭배했어요. 호랑이가 힘을 내려준다는 이야기도 많죠. 『삼국유사』에는 훗날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젖먹이 시절, 부모가 일할 때 호랑이가 젖을 먹였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그만큼 견훤이 강하고 위대한 장수라는 의미로 쓰인 겁니다.

우리네 이야기 속에서 호랑이가 이처럼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호랑이가 가깝고도 위험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영상물에선 ‘옛날에는 호환, 마마(천연두),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라는 경고문이 나왔어요. 호환, 그러니까 호랑이에 의한 피해가 전쟁이나 대규모 전염병 못지않았다는 거죠. 실례로 조선 시대에는 매년 수백 명이 호랑이의 피해로 죽거나 다쳤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한때 한반도에 수백에서 수천 마리의 호랑이가 살았다는데, 백두산이나 금강산뿐 아니라, 경복궁 바로 뒤 인왕산에도 있었을 정도죠. 얼마나 호랑이가 많았는지 ‘착호갑사(捉虎甲士)’라는 호랑이를 잡는 특수부대가 있었다고 할 정도니까요. 그만큼 호랑이를 두려워한 사람들이 호랑이를 숭배하거나, 반대로 멍청한 모습으로 그려서 조금이라도 두려움을 줄이려 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호환이 많았던 것은 사람의 탓이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는 시베리아와 연결된 산맥 덕분인지 초식동물도 많고, 먹이가 많다 보니 호랑이도 많이 살았는데요. 사람들이 늘어나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게 되며 산과 숲이 줄고 먹이도 줄었습니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 않던 인간을 노리게 된 것도 모두 그 때문이죠. ‘담배 피우던 호랑이’처럼 친숙하고, 88서울올림픽의 상징이 되었을 만큼 가까웠던 호랑이는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직 옛이야기나 동물원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죠. 호환이 사라진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그만큼 자연이나 신비와 멀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글=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