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하경 칼럼

이재명 ‘여배우’ 윤석열 ‘장모·아내’…깃발은 안 보인다

중앙일보

입력 2021.07.12 00:41

업데이트 2021.07.12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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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대통령 선거(2022년 3월 9일)가 여덟 달 앞으로 다가왔다. 스무 명이 넘는 후보가 꿈틀거리고 있다. 새로운 리더십을 발굴하는 대선은 공동체의 항로(航路)를 결정하고 기운을 채워넣는 민주주의 특유의 페스티벌이다. 그런데 지금의 양상은 실망스럽다. 선두인 이재명·윤석열도, 다른 후보들도 문재인을 넘어설 가치를 내놓지 못했다. ‘여배우 스캔들’ ‘장모·아내 의혹’ 대응은 낙제점이다.

당연한 검증인데 비상식적 대응
문재인 넘어설 가치도 제시 못해
통합적 국정운영자가 진정한 거인
긴 분열의 시대에 종지부 찍을 것

이재명은 “바지 한 번 더 내릴까요”라고 했다. 민주당 경선은 ‘포르노 경선’이 됐다. 윤석열은 장모가 요양급여 부정 수급 혐의로 징역 3년의 실형을 받은 데 대해 “법과 원칙에 따라 누구나 동등한 수사와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먼 산 보고 남 얘기하듯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했다. 다른 후보들도 심장을 뛰게 하는 한 방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대통령감이 없는 상태에서 선거를 치러야 한다.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이 민심과 불화하고 몰락하는 장면을 목격해야 할 판이다. 완벽한 부조리극이다.

이승만·박정희·김대중은 사형수였다. 몰락하는 왕조의 공화주의자 이승만은 반역죄로, 남로당원 장교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으로, 비타협의 정치인 김대중은 전두환 신군부가 조작한 내란음모 혐의로 처형될 뻔했다. 김대중은 “밖에서 발자국 소리만 나도 깜짝깜짝 놀랐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김영삼은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으로 전두환 정권과 대결했다. 가혹한 운명과 직면했지만 물러서지 않은 거인들이었다. 결국 이승만은 건국, 박정희는 산업화, 김영삼·김대중은 민주화를 국민과 함께 성취했다.

노태우는 반공(反共)이 몸에 밴 군인 출신이지만 북방외교로 중국·소련과 수교하고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들었으며 최초의 통일 방안을 여야 만장일치의 합의로 탄생시켰다. 수구·냉전의 틀에 갇힌 보수(保守)를 보수(補修)해 남남통합을 이뤄낸 선구자다. 5인의 대통령에게는 과(過)도 있지만 그래도 공(功)이 더 많았다.

양김(兩金) 이후로는 세계 일류의 경제력과 민도에 어울리는 대통령이 나오지 않고 있다. 준비되지 않은 제왕적 대통령들이 국내외의 파고를 감당하지 못해 국민을 힘들게 했다. 하지만 애타게 기다린다고 저 광야에서 백마를 탄 초인(超人)이 홀연히 나타날 리 없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각축하는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이 청와대의 새 주인이 될 것이다.

지금 유권자들에겐 최선이 아닌 차선의 선택밖에 없다. 후보들은 자신의 인간적·정치적 실체와 견해를 숨김없이 드러내야 한다. 유력 후보인 이재명·윤석열은 어떤 혹독한 검증도 달게 받아야 한다. 지금처럼 질문자를 공격하거나 딴청을 부리면서 답변을 회피하는 태도는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재명은 ‘여배우 스캔들’에 대해 먼저 사실 여부를 솔직히 밝히고 거취를 국민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윤석열이 아내 논문 표절 의혹이 제기되자 측근을 통해 이재명·정세균·추미애 논문 표절 의혹을 거론하는 것은 순리(順理)가 아니다. 장모 문제도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겸허하게 국민의 판단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스무 명이 넘는 후보 중 누구도 “이런 나라를 만들겠다”는 선명한 메시지를 발신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의 친문(親文) 이낙연·정세균은 국민이 분노하는 부동산 실정(失政)의 해법으로 ‘시장에 맞서는 규제 위주의 대책’을 내놓았다. 이재명도 “대통령이 말씀하신 데 모든 답이 들어 있다”고 했다. 문재인을 넘어서려는 용기와 소신이 없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끄는 반도체 산업은 최후의 경제·안보 보루다. 그런데 미국·중국·대만·일본의 총공세에 맞설 수 있도록 과감하게 규제를 풀겠다는 목소리는 내지 않는다. 그저 골수 지지층의 눈치나 살피고 있다.

야권 후보들도 마찬가지다. “반(反)문재인”만 반복할 뿐 대안의 깃발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현 정권의 각종 실정(失政)은 폐기하더라도 한반도 평화 정착에는 뜻을 함께한다는 메시지를 낸 사람은 전무(全無)하다. 박정희가 김일성과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의 7·4 남북 공동선언을 했고, 노태우가 김대중·노무현·문재인에 앞서 남북관계 개선의 초석을 깔았던 보수의 전사(前史)를 잊고 퇴행하고 있다. 치열한 고민도 없이 로또복권에 당첨돼 정권을 잡고 싶은 욕심만 가득하다.

이대로 가면 공멸한다. 대선 과정에서 여야, 진보·보수의 협력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박정희가 1964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다 곤경에 처했을 때 김대중은 ‘여당의 첩자’로 몰리면서도 공개적으로 찬성했다. “경제대국으로 무섭게 성장하는 일본을 활용해야 한다”는 논리는 진영을 초월한 실사구시의 탁견(卓見)이었다.

레드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운 보수가 남북관계 개선에 앞장서고, 노동친화적인 진보가 노동개혁에 앞장선다면 통합의 정치가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유연하고 협력적인 자세로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후보가 나올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긴 분열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진정한 거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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