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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파는 생선가게, 사랑방된 반찬가게...온라인 시대, 작은 '동네 가게'들의 특별한 생존기

중앙일보

입력

엄지 두 개를 몇 번 놀리면 다음 날 새벽 집 앞으로 장바구니가 도착한다. ‘쿠팡’ ‘마켓컬리’ 등 물류와 자본을 앞세운 거대 플랫폼이 일상을 지배하면서 온라인 장보기와 새벽 배송은 너무나 익숙해졌다.

그만큼 동네 생활은 건조해졌다. 골목마다 하나쯤 있었던 철물점과 문구점, 과일 가게와 책방 대신 편의점만 여럿 불을 밝힌다. 웬만한 물품은 모두 온라인으로 받아볼 수 있다. 동네 가게가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는 이유다. 살아남은 것 자체가 성공이라 할 수 있는 요즘, 작은 가게 다섯 곳의 특별한 생존법을 소개한다.

장르 파괴 특화 상품이 무기다  

여느 동네 생선 가게와 달리 깔끔함이 돋보이는 '생선씨'. 구이용 생선은 물론 초밥 도시락과 와인 등을 함께 판다. 사진 생선씨

여느 동네 생선 가게와 달리 깔끔함이 돋보이는 '생선씨'. 구이용 생선은 물론 초밥 도시락과 와인 등을 함께 판다. 사진 생선씨

서울 용산구 이촌동의 ‘생선씨’는 생선 가게지만 생선 가게만은 아닌 독특한 가게다. 약 9.9㎡(3평) 남짓 작은 상점에 들어서면 생선 가게 특유의 비린내 대신 백화점 수산 코너 수준으로 깔끔하게 놓인 생선들이 손님들을 반긴다. 삼치·가자미·고등어 등 국민 생선부터 금태·연자돔 등 고급 생선까지 구성도 제법 다양하다.

생선 매대 맞은편 냉장고에는 초밥 전문점 못지않은 고급 초밥과 회 도시락도 볼 수 있다. 소담하게 담긴 회 도시락 옆으로는 내추럴 와인까지 구비했다. 근처 한강에서 소풍을 즐기며 회와 와인을 즐기는 손님을 위한 ‘피크닉 세트’도 눈에 띈다.

최시준 생선씨 대표는 “백화점이나 대형마트까지 가지 않으면 동네에서 다양한 생선을 사기가 어렵고, 근처 시장이 있다 해도 깔끔하지 않아 잘 안 가게 되는 것 같아 시작한 생선 가게”라며 “단순 생선 가게라기보다 생선구이부터 초밥·회 등 바로 먹을 수 있는 것, 도치 알탕이나 대구탕과 같은 즉석 밀키트 등까지 취급하는 해산물 그로서리(식료품점)를 표방한다”고 했다.

생선은 일정 비용을 내면 구워주는 서비스를 한다. 외부 지역에서 오는 손님들도 있지만 주로 동네 단골들이 많다. 사진 생선씨

생선은 일정 비용을 내면 구워주는 서비스를 한다. 외부 지역에서 오는 손님들도 있지만 주로 동네 단골들이 많다. 사진 생선씨

모듬회 세트와 피크닉 세트. 주변 한강 고수부지에서 소풍을 즐기는 손님들이 사간다. 사진 생선씨

모듬회 세트와 피크닉 세트. 주변 한강 고수부지에서 소풍을 즐기는 손님들이 사간다. 사진 생선씨

동네 슈퍼지만 와인만 700여 종류가 있는 서울 광진구 자양동 ‘조양마트’는 전국구 유명 슈퍼다. 근처 ‘새마을 구판장’과 함께 동네 슈퍼 와인숍 1세대로 불리는 이곳은 와인 전문점 못지않은 다양한 구색의 와인을 합리적인 가격대로 제공한다. 주말이면 지방에서까지 와인을 사러 올라와 카트 가득 몇십 병씩 와인을 사서 가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대형마트나 편의점에 많은 저가 와인뿐 아니라 백화점에서도 보기 어려운 고급 와인과 인기 와인을 고루 들이고, 와인과 어울리는 치즈 등 안줏거리부터 와인 잔, 디캔터, 와인 셀러 등까지 갖췄다. 인기의 비결은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동네 슈퍼면서도 와인에 진심이라는 점이다. 조양마트 인스타그램에는 그날그날 새로 들어온 와인은 물론 와인과 어울리는 안주 등 정보도 가득하다.

시장 안에 위치한 식자재 마트지만 와인만큼은 전문점 못지 않게 갖춰놔 와인 마니아들도 많이 찾는다. 사진 조양마트

시장 안에 위치한 식자재 마트지만 와인만큼은 전문점 못지 않게 갖춰놔 와인 마니아들도 많이 찾는다. 사진 조양마트

이촌동 생선씨와 자양동 조양마트의의 공통점은 장르를 넘나드는 특화상품을 개발했다는 점이다. 생선 가게는, 혹은 동네 마트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탈피해 해산물과 와인이라는 한 가지 특화상품을 파고들어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사랑받는 동네 플랫폼이 돼라

남산 인근 경리단길 아파트 단지 초입에 위치한 보마켓.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이 됐다. 사진 보마켓

남산 인근 경리단길 아파트 단지 초입에 위치한 보마켓.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이 됐다. 사진 보마켓

아무리 온라인 쇼핑이 발달했다고 해도 가벼운 차림으로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집 근처 가게들은 그 자체로 ‘복지’가 된다. 동네 사람들과 만나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 과거 동네 사랑방만큼은 아니더라도, 직접 얼굴을 보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의 가치는 지금 시대에도 유효하다.

남산 자락에 벌써 두 개가 있고, 서울역 근처에 또 하나의 상점을 열 준비를 하는 ‘보마켓’은 생활밀착형 동네 슈퍼이자 동네 플랫폼을 지향한다. 딱 정해진 주제가 없는 가게 콘셉트로 식료품부터 치약·비누 등 생활용품은 물론 샌드위치나 떡볶이 등 간단한 음식도 판매하는 이곳은 슈퍼와 간이 식당, 동네 사랑방 역할을 자처한다.
유보라 보마켓 대표는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것이면 편의점만으로 충분하겠지만 잠시라도 머무르면서 동네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며 “점점 문구점이나 꽃집 같은 동네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장소가 사라지고 있어 아쉽다”고 했다.

일반 편의점이나 슈퍼에서는 찾기 어려운 치즈나 신선한 샐러드 채소, 과일, 와인 등 상품 구성에도 공을 들였지만, 무엇보다 슬리퍼를 신고 나와 동네를 산책하다 부담 없이 들를 수 있도록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남산맨션 보마켓 1호점에는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며 놀 수 있게 스케치북을 가져다 놓고, 이태원 경리단길의 보마켓 2호점에는 강아지 산책시키는 주민들이 많아 강아지용 쿠키와 빵을 낸다.

근처 슈퍼에 구비되지 않은 물품을 중심으로 갖춰 상품 구성이 겹치지 않도록 노력한다. 사진 보마켓

근처 슈퍼에 구비되지 않은 물품을 중심으로 갖춰 상품 구성이 겹치지 않도록 노력한다. 사진 보마켓

치약이나 비누 등의 물품도 가져다 놓고 샌드위치나 떡볶이 등 가벼운 음식도 판매한다. 사진 보마켓

치약이나 비누 등의 물품도 가져다 놓고 샌드위치나 떡볶이 등 가벼운 음식도 판매한다. 사진 보마켓

서교동 ‘슈퍼스티치’는 동네 주민이 참새 방앗간처럼 들려 한 끼 때우고, 이웃을 만나 커피를 마시거나 밀린 업무를 마무리하기 좋은 장소다. 옛 수입 식료품점인 ‘미제가게’ 콘셉트로, 동네 커뮤니티를 넘어 동네의 ‘거실’이 되겠다는 게 목표다.

여기선 키오스크로 돈가스·족발·냉면·김치찌개 등을 주문해 먹을 수 있고, 호주 스페셜티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유기농 제철 과일도 배달해준다. 진열된 상품은 뒤죽박죽이지만, 보물찾기의 재미가 있다.
와인병과 소주병 옆에는 단호박 모닝죽이 놓여있고, 바로 앞에는 비누·인센스스틱(향초나 향침)·주방세제·숟가락 등 생활용품이 있다. 고개를 돌리면 번화가 길거리에서 판매하는 수제팔찌와 목걸이 등 액세서리를 구경할 수 있다.

김수민 대표는 슈퍼스티치를 실험 차원의 공간으로 봐달라고 말했다. 그는 “쿠팡과 마켓컬리 등 온라인 기반 산업이 성장하고 있지만 소비재와 경험재로서 공간 중심의 오프라인 매장도 상품성이 있을 거란 판단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로 했다”며 “무조건 회전율만 높이다간 부쩍 오른 인건비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 커뮤니티 기능이 강화된 개념의 매장을 시도했다”고 설명했다.

와인부터 비누, 주방세제 등 생활용품까지 뒤죽박죽 진열된 상품은 보물찾기의 재미를 선사한다. 사진 슈퍼스티치

와인부터 비누, 주방세제 등 생활용품까지 뒤죽박죽 진열된 상품은 보물찾기의 재미를 선사한다. 사진 슈퍼스티치

동네 주민이 참새 방앗간처럼 들러 한끼를 떼우고 커피도 마실 수 있는 공간이다. 사진 슈퍼스티치

동네 주민이 참새 방앗간처럼 들러 한끼를 떼우고 커피도 마실 수 있는 공간이다. 사진 슈퍼스티치

사진 슈퍼스티치

사진 슈퍼스티치

온·오프 경계를 허물어라

당일 먹는 반찬의 경우 온라인보다 오프라인 매장이 접근성면에서 효과적일 수 있다. 여기에 온라인 활용한 비대면 배달 전략도 활용해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사진 슈퍼스티치

당일 먹는 반찬의 경우 온라인보다 오프라인 매장이 접근성면에서 효과적일 수 있다. 여기에 온라인 활용한 비대면 배달 전략도 활용해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사진 슈퍼스티치

동네 가게들은 매장이 중심이지만 비대면·온라인 접점도 필수다. 오히려 대면 판매를 주로 하는 동네 가게들이야말로 비대면 선택지를 보완하면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서울 시내 약 40여개 매장을 직영으로 운영하는 반찬가게 ‘슈퍼키친’의 매장에는 주방이 없다. 고객 응대에 집중하기 위해 조리는 경기도 부천에 있는 공장에서 전담한다. 동네 주민들이 직접 들러 반찬을 사 가는 경우도 많지만, 오후 6시까지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다음 날 집 앞 새벽 배송도 가능하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장점을 섞는 이유는 간단하다. 편리한 온라인 주문 못지않게 당일 먹는 반찬을 눈으로 보고 구매한 뒤 곧바로 식탁에 올리려는 수요도 높기 때문이다. 최건영 슈퍼키친 공동 대표는 “속도를 따져볼 때 구매 후 배송까지 반나절 또는 하루가 걸리는 온라인 플랫폼보다 집 앞에서 방문 구매하는 동네 상권은 아직은 덜 성장한, 즉 기회가 있는 시장이라고 생각한다”며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퇴근길에 들려 식자재를 쇼핑하는 동네 상권의 중심이 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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