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신고산타령에 ‘와우아파트~’…입방정 때문에 강제입대"

중앙일보

입력 2021.07.10 00:10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19〉 입방정 탓 전격 입영

조영남씨와 고 이태영 변호사. 조영남씨는 1973년 제대 이후 1974년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에 찍은 사진으로 기억했다. [사진 조영남]

조영남씨와 고 이태영 변호사. 조영남씨는 1973년 제대 이후 1974년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에 찍은 사진으로 기억했다. [사진 조영남]

이번엔 내가 어떻게 군대엘 갔는지 그걸 얘기해봐야겠다. 잘만 하면 나는 군대에 안 갈 수도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지금부터 50여 년 전에는 병역 심사하는 사람에게 푼돈을 찔러주고 시력 미달이나 중이염 증세 같은 걸로 군입대를 몇 년이고 연기할 수가 있었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 하는 일이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곤 했다. 그런 방식으로 나는 3년째 군입대를 연기해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괴상망측한 모양새로 전격 군대를 가게 된다.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노래 한 곡을 잘못 부르면서 군대로 직행하게 된 것이다.

김시스터즈 내한공연서 MC·노래
아파트 붕괴 비웃자 기관원이 조사
‘병역기피’ 뒤집어씌워 긴급체포

정대철 어머니 이태영, 적극 변호
“다른 의도 없어, 군대 보낼 것” 각서
훈련소 가는 내내 함께 눈물 흘려

그때 광화문에 있던 시민회관(지금 세종문화회관 자리)에서는 당시 미국에서 맹활약 중이던 김시스터즈의 내한공연이 TBC 방송국 초청으로 열렸던 때다. 김시스터즈는 지금 왕성해진 K팝의 출발신호이기도 하다. 나는 거기서 초대가수 겸 MC를 맡았다. 믿거나 말거나 난 그때 ‘딜라일라’를 불러 조용필이나 서태지와 아이들쯤으로 스타덤에 우뚝 섰던 때다. 행사 당일 나는 내게 배당된 노래 두 곡을 부르고 오늘의 주인공, 미국에서 내한한 김시스터즈를 소개하는 것이 그날의 각본이었다.

파랗게 질린 TBC 담당자 “무조건 토껴”

공연 당일 시민회관은 인산인해였다. 나는 요란한 박수를 받으며 통기타를 들고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무대 앞으로 나가 기타의 A 마이너 코드를 쾅! 튀기며 ‘신고산이 우우르르으으’까지 ‘신고산타령’의 도입부로 들어간 다음 마땅히 ‘함흥차 떠나는 소리에’로 나가야 하는데 순간 몇 주 전 TV에서 본 와우아파트 붕괴 모습이 떠올라 가락을 따라 ‘와우아파트 무너지느은 소오리에에에 얼떨결에 깔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누나아아 어랑어랑어허야’로 노래를 이어갔다.

객석에선 박장대소와 갈채가 파도를 이루었다. 내친김에 나는 남인수 대선배님의 노래 ‘산유화’를 부른 다음 오늘의 주인공 김시스터즈를 멋지게 소개하고 퇴장했다. 남은 일은 노래 잘 들었다, 재밌었다, MC를 잘해냈다, 칭찬받는 일만 남았다. 워낙 관객 반응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사태는 수상하게 돌아갔다. 방송국 행사 담당자나 내 매니저의 얼굴빛이 누렇게 뜬 채 “야! 조영남 무조건 토껴(도망치라는 뜻). 자리를 피하란 말야” 하는 거였다. 반대쪽 대기실로부터는 이미 기관원들이 나를 찾는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민회관과 서울시청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다. 그보다는 그렇지 않아도 서울시가 야심 차게 지은 아파트가 무너져 온통 비상사태인데 가수 나부랭이가 무대에서 와우아파트 붕괴를 콧방귀 뀌듯 비웃으며 그걸 노래로 불러 젖혔으니 서울시청 고위직원 하나가 “뭐라구? 그 못생긴 조영남이? 그놈 당장 조사해봐”, 이렇게 된 거다.

나는 능지처참감이었고 조사 결과 나이 25세에 군 미필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나는 매니저 일행의 도움을 받으며 뒷문으로 빠져나와 단숨에 가까운 서울신문사 장태화 사장님 방으로 일단 몸을 숨겼다. 당시 현 정부의 실세였던 장 사장님께 자초지종을 털어놓으면 무사할 것 같아서였다. 바로 얼마 전 서울신문사 제정 서울문화대상에서 내가 대상 부문을 수상했고 나에게 직접 시상을 해주시고 격려도 주신 분이 장태화 사장님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얼마간 숨어 있다가 “됐어! 집에 가 있어” 소리를 듣고 늦은 밤 내가 살던 동부이촌동 시민 아파트로 돌아왔다. 온종일 아들 찾는 전화 소리로 시달리신 어머니가 차려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나는 잠에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잤을까. 어머니가 나를 깨우는 것이었다. 밖에 손님이 와서 나를 찾는다는 것이다. 나는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나갔더니 카키색 잠바 차림의 두 남자가 정중하게 “같이 가야겄는디유” 해서 따라 나가 대기시켰던 지프차에 올랐다. 홍성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내 본적은 충남 예산군으로 되어 있는데 왜 그 옆 홍성군으로 가야 하느냐 했더니 예산에는 아직 법원도 재판소도 없다는 것이었다.

내 생각이 맞았다. 와우아파트 타령으로는 벌주기가 좀 옹색하므로 병역 기피로 뒤집어씌워 긴급체포에 나섰던 거다.

그렇다. 나의 입방정과 경솔함이 나를 평생 괴롭혀왔다. 군 입대는 50년 전 입방정의 결과물이지만 최근 5년 전 입방정은 나를 경제적 몰락으로 이끌어갔다. 다름 아니라 미술 대작 사건이 터졌을 때의 입방정 “내 그림이 맘에 안 들면 내게 다시 가져와라. 환불해주겠다”, 이런 말 말이다.

서울신문사 장태화 사장으로부터 서울문화대상을 받는 조영남씨. [사진 조영남]

서울신문사 장태화 사장으로부터 서울문화대상을 받는 조영남씨. [사진 조영남]

나는 설마 내 그림을 환불해달라는 사람이 있을까 자신만만했는데 웬걸! 환불요청이 물밀 듯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쫄딱 망했다. 나는 아파트까지 뺏기는 줄 알았다. 환불처리에 각종 변호사비에 돈 나가는 속도가 들어오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는 걸 그때 실감했다.

환불해준다는 입방정 대신 당당하게 “재판 결과를 보고 환불을 고려해보겠습니다”라고만 했어도 쫄딱 망하지는 않고 모든 재판에서 무혐의 판정을 받았으니 환불소동도 피할 수 있었는데 아! 후회가 막심했다. 최종적으로 받아본 법원으로부터의 편지에는 최종판정이 무혐의였기 때문에 재판으로 인한 손해 액수(환불이나 변호사 비용)는 법적 절차를 거쳐 청구 보상할 수 있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우리네 법체계의 완벽함에 새삼 놀랐다.

홍성 재판소 뒷마당에 도착하니 벌써 훤한 아침이었다. 출근하는 사람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전 내내 들어와라 나가라 조사를 받아라, 이런 지시도 없이 그냥 하염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왜 아무런 말이 없을까. 날더라 도망치라는 의미일까. 나는 그때 아침 점심 식사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생각이 나질 않기 때문이다. 오후로 접어들 무렵 드디어 짜자잔! 3인의 구원병이 내 앞에 나타났다. 성경에 나오는 동방박사 세 사람이 따로 없었다. 첫째는 별을 따라 홍성까지 무사하게 내려온 운전기사 장씨 박사. 두 번째는 정일형(전 외무장관) 이태영(이화여대 법정대학장) 부부의 큰아들(서울법대 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가기 전이었다. 후에 5선 국회의원 됨) 정대철 형님. 세 번째가 대표 동방박사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여류변호사이신 이태영 박사. 이렇게 세 명의 박사가 나를 구출하기 위해 홍성 벌에 나타나신 것이었다.

이태영 학장님은 홍성에서 대전을 오가며 나를 위한 변호를 펼쳤다.

“얘가 와우아파트 노래를 부른 건 정치적으로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얘는 그냥 순진무구한 가수일 뿐이다. 얘를 병역 기피죄로 감옥에 가두면 뭐가 시원하겠느냐. 내가 보증을 서겠다. 얘를 한 달 이내에 꼭 군대에 책임지고 보내겠다.”

그런 내용의 각서에 사인을 하고 나를 풀려나게 했던 거다. 요즘 같으면 있을 수도 없는 로비가 성립된 데에는 홍성 쪽 검사 조승형(국회의원이 됨)이 이태영 학장의 서울법대 후배였던 점이 작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대 신입생 환영회서 이태영 학장과 인연

그럼 어떤 연유로 이태영 학장님이 DDR 딴따라 가수 조영남을 구하러 시골까지 내려오게 된 건가. 물론 사연이 있었다.

내가 서울음대를 다니다가 ‘딜라일라’라는 노래를 불러 일약 톱 가수의 대열에 올랐을 때 어느 날 나는 이화여대 법정대학 학생회 측으로부터 신입생 환영 음악회에 초대를 받게 된다. 나는 내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을 대동하고 멋진 공연을 펼쳐준다. 행사가 끝난 다음 의례적으로 학장님과 접견하는 자리에서 학장님의 돌발 질문을 받게 된다.

“얘들아! 너희들은 돈 안 받고는 노랠 안 부르니?”

나는 공부를 많이 한 아줌마의 질문이 저렇게 어린아이 같을까 신기하게 여겨졌고 대표 격으로 대답을 했다.

“아닙니다. 돈 안 받고도 얼마든지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이 대답으로 나는 몇 해 동안 이태영 학장님이 단골로 방문하시던 불광동 소년원 방문 위로 음악회를 제공하게 된다. 내가 유독 이태영 학장님의 눈에 들게 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학장님은 소년원 아이들 앞에 각별히 조심해라, 상처받기 쉬운 아이들이다, 신신당부했다.

나는 완전 내 스타일로 막 대해 더욱 친근해지는 방법을 구사했다. 그 후 나는 이태영 학장님이 어떤 연유로 조영남과 가깝게 됐는가 하는 질문에 이런 식으로 대답하는 걸 몇 번이나 들은 적이 있다.

“쟤가요, 앤처음(맨처음의 이북 사투리) 불광동 소년원으로 노래를 시키기 위해 데리고 갈 때 참 불안했어요. 그래서 불쌍한 고아원 아이들 앞에서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일러뒀어요. 그런데 얘가 고아원 얘들 앞에 서서 뭐랬는지 아세요? ‘야! 너이들은 내가 누군지 알아? 나는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미남 가수 형님이시다. 코가 납작하지만 그래두 나는 최고 잘 나가는 오빠이시다. 너이들은 글렀어! 왜 머리 빡빡 깎고 우중충하게 거기 쭈그리고 있냐. 너이들 나쁜 짓 했지? 그래도 괜찮아. 너이들 용서를 받고 어서 교도소 밖으로 나와야 해. 밖에서 나를 만나면 꼭 인사를 해야 돼. 약속이다. 약속 안 지키면 혼내줄 거야, 알았지?’ 이러는 거에요. 그러면서 먹던 사과를 아이들 입에 물려주고 먹던 떡도 갈라먹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얘들이 쟤를 너무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친형 친오빠처럼 말에요. 그걸 보고 제가 깨달았죠. 아하! 쟤가 심상치 않구나. 맘을 먹게 됐죠.”

그 후 실제로 나는 명동이나 무교동에서 구두를 닦던 아이들이 형! 하며 달려오는 모습을 여러 번 보게 된다.

홍성재판소에서 풀려난 후 나는 약속대로 한 달간을 이태영 학장님의 봉원동 집 위층에 머물며 군에 입대할 준비를 착착 하게 된다. TV에서도 이장희가 만들어준 ‘안녕’을 부르며 고별쇼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다.

이태영 학장님 집에 한 달 간 머물면서 많은 문화충격, 가령 온통 집안 식구가 서울대 이화여대에 박사 변호사여서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하는구나! 집에 모여든 김대중 등 정치인들이 모여 토론을 벌이다가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우리들과 똑같은 모양의 언어로 다투는 장면을 보며 사람은 인격수양이 중요하구나! 하는 식의 문화충격을 크게 받게 된다. 홍성재판소에서의 약속대로 이태영 학장님은 나를 차에 태우고 조치원 훈련소로 직접 가게 된다.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건 가는 내내 이 학장님이 내 옆자리에서 우셨다는 사실이다. 물론 나도 울긴 했지만 도대체 왜 울어야 했는가. 나라를 지키러 가는데 말이다. 하여간 그런 식으로 나는 군대에 들어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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