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백골이 진토되어’ 8대조 산소 열었더니 검은 흙만…

중앙일보

입력 2021.07.09 13:00

업데이트 2021.07.12 11:03

[더,오래] 조남대의 은퇴일기(19)

밤새 내리던 초여름 비는 새벽녘이 되자 그쳤다. 묘지 이장하는데 비를 맞으며 일할 후손을 염려한 조상께서 은덕을 베푸신 것 같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드디어 종중묘지가 조성되자 수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이 속이 후련하다.

2019년 시제를 지낸 후 음복하는 자리에서 종중묘지 조성문제가 거론되었다. 그 자리에서 8대 종손인 우리 집에서는 선조들이 모셔져 있는 산 일부를 묘지 터로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묘지 조성문제는 순조롭게 진행되다가 비용 부담 문제가 대두하자 주춤거렸다. 그러던 중 고향 땅이 새로 조성되는 산업단지에 포함되어 집과 농토를 보상받고, 조상의 산소도 이장할 수밖에 없어 다시 힘을 얻어 진행되었다. 묘지 조성 시 측량과 허가 과정에서의 비용과 세금도 만만치 않았다.

이장하기 위해 종중묘지를 조성한 모습. [사진 조남대]

이장하기 위해 종중묘지를 조성한 모습. [사진 조남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 종중묘지가 조성되고 기부금과 묘지 이장비로 종중기금도 여유 있게 마련되었다. 조상의 유골을 화장한 후 1평 반 정도 넓이의 묘역에 안치했다. 40여 명이 넘는 종친이 모여 합동 제사를 지낼 때는 그간 어려웠던 일이 뇌리를 스쳤다.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한곳에 모시게 되자 이제 종손으로서 조상을 뵐 면목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친의 생전 숙원 사업인 고향 주변에 흩어져 있던 26기의 산소를 개장해 종중묘지로 이장함으로써 마음이 한결 가뿐했다.

어린 시절 한동네에서 같이 살 때는 명절이면 9촌까지 이집 저집 오가며 차례를 함께 지냈는데, 나이 들고 객지에 흩어져 살다 보니 서먹서먹하고 거리감이 생기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도 자주 보지 않으니 마음도 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도시화와 핵가족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만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아쉽다. 이제는 일 년에 한두 번이라도 함께 모여 벌초하고 시제를 지내며 얼굴을 볼 수 있으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종중묘지에 벌초하는 종친들.

종중묘지에 벌초하는 종친들.

사람의 힘으로 한다면 한나절은 걸렸을 텐데 굴착기가 커다란 봉분을 두세 번 끌어당기자 250년 된 산소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동네 뒷산에 있어 어릴 때 친척들하고 뒹굴며 뛰어놀기도 하고, 시제 때 제일 먼저 차례를 지냈던 8대조 산소다. 한참을 파 내려가자 누런 황토에 검은색이 베여 있으면서 사람이 누울 만한 크기의 자국이 드러난다. 이장하는 인부들이 호미로 조심스럽게 주변을 긁어낸다. 바닥의 생 땅이 나오도록 파 보았지만, 아무런 흔적이 없다. 시신이 완전히 흙으로 돌아간 것이다.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고 어찌 이렇게까지 되셨단 말인가? 검은 흙 부분을 창호지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정몽주의 단심가에 나오는 ‘백골이 진토되어’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사람이 죽으면 이렇게 될 수가 있구나’하는 생각이 스친다.

불과 10여 m도 떨어지지 않은 7대조는 누우신 모습 그대로 유골이 드러났다. 10여 년 된 또 다른 산소는 지대가 낮고 습한 곳이라 시신이 매장 때 모습 그대로 관속에 누워 계셨다. 사실 종중묘지를 조성한 초창기에는 묘지 개장하는 장면을 보면 상당히 두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실제로 보자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의아하기까지 하였다. 이백 년 이상 지났는데도 어떤 곳은 흔적조차 없지만, 또 어느 할아버지는 박물관에 전시된 사람 뼈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매장 당시와 같은 모습으로 계셨던 분은 묘지를 새로 조성하지 않았다면 그대로였을 텐데 이번에 이장하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조상들이 햇볕이 잘 드는 곳으로 이사하셨으니 얼마나 좋아할까?

말끔히 벌초한 종중묘지.

말끔히 벌초한 종중묘지.

종중묘지에서 시제를 지내고 있는 종친들.

종중묘지에서 시제를 지내고 있는 종친들.

산소를 개장했을 때 대부분의 유골은 흙 속에 스며들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아쉬웠지만, 자연과 동화된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영혼은 하늘나라로 가고 육신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실감 났다. 아옹다옹 살아도 사후에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으며, 세월이 흐르면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나누고 베풀며 살아야지, 욕심을 내어 끌어안고 있으면 곱게 보이지 않는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올곧게 살다 보면 조상님들 아래에 묻힐 때도 떳떳할 것 같다.

종중묘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종친 간의 이견과 섭섭한 마음에 잠 못 이루는 밤도 많았다. 이번 기회에 그동안 소원했던 종친을 자주 만나 대화하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들기도 했다. 많은 어려움을 해결하고 조상을 한 곳에 모셔 후손이 함께 차례를 지낼 수 있어 다행스럽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힘과 뜻을 모으면 일가친척 간의 우애를 다지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종손으로서 소임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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