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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조식은 의리, 이황은 수양…두 사람 특성 비교해보니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104)

“이황은 온화하고 인정이 두터우며 실천이 독실합니다. 공부는 매우 숙련되어 그 단계가 분명하므로 배우는 자가 그 길을 쉽게 찾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반면 조식은 엄정하고 재기가 호탕합니다. 학문은 스스로 도를 깨달아 우뚝 서서 혼자 나아가므로 배우는 자가 그 요체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1579년 선조는 한 선비에게 창녕 현감 벼슬을 내린다. 그리고는 그가 스승으로 모신 대학자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기상과 학문이 어떠냐고 묻는다. 뜻밖의 질문이다. 순간 선비는 임금 앞에 두 스승의 특성을 조심스레 비교한다. 바로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선생이다. 두 스승이 세상을 떠난 뒤다. 선조는 자신이 알고 있는 퇴계와 남명을 제자를 통해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한강 정구 선생을 기리는 경북 성주군 회연서원(檜淵書院) 전경. [사진 송의호]

한강 정구 선생을 기리는 경북 성주군 회연서원(檜淵書院) 전경. [사진 송의호]

한강을 말할 때 퇴계와 남명과의 만남은 빼놓지 않는 대목이다. 한강이 도산서당으로 퇴계를 처음 찾은 것은 1563년, 그의 나이 21세였다. 63세 퇴계는 이미 조야에 명성이 자자했다. 청년과 원로의 만남이다. 한강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한 학문의 방법과 목적 등을 터득한다. 문집인 『한강집』은 그날을 이렇게 정리했다.

“계해년 봄 선생이 퇴계 선생을 뵙고 의심나는 곳을 질문했는데, 이 선생께서 성인(聖人)의 문하에서 학문하는 순서와 방법을 말씀하셨다. 이에 비로소 지난날 향하는 바가 정해지지 않았음을 깨닫고 마음속으로 채찍질함에 규모가 확대되고 사업이 날로 커졌다.”

1566년 한강은 이번에는 남명을 찾아간다. 이때 남명은 “사군자(士君子)의 큰 절개는 오직 출처(出處)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너는 출처를 약간 알고 있으니 나는 마음속으로 너를 인정한다”고 했다. 한강을 제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회연서원 숭모각의 내부. 한강 정구의 초상화와 교지 등이 보인다. [사진 송의호]

회연서원 숭모각의 내부. 한강 정구의 초상화와 교지 등이 보인다. [사진 송의호]

한강은 이렇게 당대 조선을 대표하는 대학자를 한꺼번에 스승으로 모셨다. 그러나 두 스승은 삶의 방식이나 학문적 지향이 확연히 달랐다. 그래서 한강은 두 스승으로부터 장점을 고루 물려받지만 다른 지향점이 후일 짐이 되기도 했다.

한강은 30대 한강정사 시기를 거쳐 회연초당에서 40~50대에 후학을 양성한다. 그러다가 1604년 그의 나이 62세에 공조참판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성주 수륜면 대가천 계곡으로 들어간다. 한강은 대가천 계곡을 ‘무흘’이라 이름 짓고 그곳에 무흘정사를 지은 뒤 8년간 은둔하며 저술에 힘쓴다. 왜일까. 우선은 주자를 닮고 싶었다.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 따 ‘무흘구곡’을 노래하고 ‘무이지’를 지었다.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된 한강의 대표 저술 『오선생예설』의 목판.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된 한강의 대표 저술 『오선생예설』의 목판.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그러나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그 무렵 남명의 제자 정인홍은 광해군을 배경으로 북인의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권력을 장악한 정인홍은 스승 조식의 문집 『남명집』을 편찬하면서 이언적과 이황의 학문을 폄훼했다. 또 정구를 향해 스승이 이황이냐 조식이냐, 즉 퇴계학파인지 남명학파인지 정체성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정구가 일찍이 두 스승을 모신 게 걸림돌이 된 것이다. 정구는 결국 정인홍과 절교를 선언했다. 그러나 한강은 이후에도 남명의 문인으로 도리를 다한다.

한강은 퇴계에다 남명까지 두 스승의 학문을 발전적으로 계승했다. 출처‧의리 등은 남명적 체질을 지향하고 학문이나 수양은 퇴계적 함양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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