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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미혼모 가정을 보는 편견과 차별 바로잡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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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오영나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

오영나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

‘건강가정’이라는 용어는 어떤 이들에게는 매우 불편하게 다가온다. 건강가정이라는 표현에는 건강한 가정과 건강하지 않은 가정을 나누어 판단하는 가치 판단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치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건강가정기본법을 보면 그 기준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법은 가정을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단위’라고 규정하면서, 모든 국민이 혼인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고 돼 있다.

시대에 뒤떨어진 건강가정기본법 #달라진 인식 변화 반영해 수정해야

이에 따르면 혼인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 미혼모 가정은 건강하지 않은 가정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법률은 사회의 가장 강력한 규범으로서 가치관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렇게 법률로 일정한 기준을 정해 건강한 가정과 건강하지 않은 가정을 분류하는 방식은 건강한 가정에 편입되지 못하는 가정 사람들에게 사회적 편견을 갖게 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사회적 편견은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폭력성을 띤다. 한국사회는 오랜 기간 미혼모의 출산을 일탈로 간주해 왔으며, 미혼모가 아이를 키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왔다. 이러한 사회적 편견의 벽 앞에서 미혼모들은 자신의 아이를 키우지 못하고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한국사회는 지금까지 20만명이 넘는 아동을 해외로 입양 보냈고, 20만명이 넘는 어머니들이 자녀와 생이별을 했으며, 이들의 대부분은 미혼모와 그 자녀들이었다. 미혼모가 자녀를 떠나보내면서 겪었던 고통은 자녀를 잃어버린 부모의 고통과 다르지 않다.

필자가 대표를 맡은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의 설립자인 미국인 리처드 보아스(72) 박사는 ‘미혼모의 대부’로 불린다. 안과의사인 그는 한국의 미혼모들이 아이를 떠나보내며 슬퍼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미혼모들이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돕기로 결심하면서 2007년 한국미혼모네트워크를 만들었다. 보아스 박사는 미혼모들이 입양보내는 대신 직접 키울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고 인식을 개선하는데 중점을 뒀다. 단체 운영과 연구 등을 지원하는데 사비를 아끼지 않았다.

사회적 편견에 맞서 미혼모들이 줄기차게 요구해 왔던 것은 자신의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권리였다. 최근 들어 미혼모에 대한 편견이 다소 줄고, 미혼모가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돕자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미혼모란 사실을 밝히고 자신의 권리를 요구한 용감한 여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활동은 10여년 전부터 시작돼 줄기차게 진행됐으며 이들을 지원하는 지속적인 노력도 뒤따랐다.

이에 힘입어 ‘혼인이나 혈연으로 구성된 가족이 아니더라도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퍼졌다. 미혼모가 더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고, 아이를 키우고 있는 평범한 엄마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예전에는 미혼모들이 미혼모 복지시설에서 숨어 지냈지만, 이제는 지역사회에서 미혼모를 이웃으로 받아들이면서 같이 살아가는 분위기도 만들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발맞춰 국가 정책도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인정하는 가족 다양성 정책이 기조로 자리 잡게 됐다.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가정에 대한 지원도 늘어나고 있다.

이미 현실이 변화하고 있고, 정책도 바뀌고 있는데 아직 법률이 과거의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면 그 법률은 개정해야 마땅하다. 가정의 형태를 분류해 건강하지 못한 가정이라는 낙인을 찍었던 과거의 가치관을 반영한 건강가정기본법 개정 움직임은 당연한 변화다. 법률이 사회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이제 건강가정이라는 용어는 역사 속으로 떠나보내고 가족의 형태에 따라 가치 판단하는 낡은 규정은 사라져야 한다.

미혼모가정도 엄마가 아이를 잘 키우고 가정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존중하는 사회야말로 진정으로 건강한 사회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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