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불행한’ 유엔인증 선진국

중앙일보

입력 2021.07.08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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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염태정 경제에디터

염태정 경제에디터

선진국을 영어로 뭐라 하나.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인가 어느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이리 물으셨다. 나라를 나타내는 컨트리(country)는 쉬운데 그 앞에 붙는 수식어가 조금 어렵다. 일부 아이들 입에서 어드밴스트(advanced), 디벨롭트(developed)같은 단어가 나온다. 선생님이 설명해 주신다. 선진국은 개발이 완료됐으니 디벨롭트 컨트리, 개발도상국 또는 중진국은 개발이 진행 중이니 디벨로핑을 쓴다. 한국은 디벨로핑 컨트린데 어서 선진국이 돼야겠지.

UNCTAD, 한국 선진국에 포함
경제·개발 성과 인정받았지만
공정 논란 속 갈등·분노 팽배
삶의 질과 행복감 여전히 낮아

한국이 유엔이 인증한 선진국이 됐다는 소식에 기억도 가물가물한 1980년대 어느 수업 시간에 들었던 디벨롭트가 떠올랐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지난 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68차 무역개발이사회 폐막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한국을 선진국 그룹에 포함했다. 한국은 그동안 개도국 그룹에 있었는데 이번에 미국·프랑스·일본 등이 있는 선진국 그룹으로 바뀌었다.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의 변경은 1964년 UNCTAD 설립이래 한국이 처음이라고 한다.

정부·여당은 열렬히 환영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유엔 회원국들의 만장일치 합의로 우리나라가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라는 점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앞서 더불어민주당도 대변인 성명을 통해 “세계가 우리나라를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인정했다”고 했다.

선진국은 상대적인 단어다. 포괄하는 범위도 넓다. 보통 경제개발이 앞선 나라를 개발도상국·후진국과 비교해서 이르는 말이다. 1인당 소득수준, 산업 구조, 교육·문화 수준, 기대수명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돈만 많다고 되는 건 아니다. 오일머니를 자랑하는 중동 국가를 선진국이라 부르진 않는다. 우리에겐 선진국에 대한 아픈 기억도 있다.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되면서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자랑하다 2년 후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서소문 포럼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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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이 인정하는 선진국이라는데, 우린 정말 선진국인가.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사회에는 따뜻함보다 갈등·분노의 기운이 강하다. 유엔 산하 지속가능 발전 해법 네트워크(SDSN)가 국가별 국내총생산, 기대수명, 삶의 질, 사회적 자원 등을 집계한 2021 세계행복보고서를 분석해서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 5월 발표한 걸 보면, 한국의 국민행복지수는 OECD 37개국 가운데 35위다. 핀란드·덴마크가 1, 2위이고 우리 뒤로는 그리스·터키가 있을 뿐이다. 노인빈곤율도 높다. 2018년 기준 43.3%로 OECD 평균(14.8%)의 세 배 수준이다. 미국 (23.1%), 일본(19.6%), 독일(10.2%)에 비해 월등히 높다. 유니세프의 어린이 웰빙지수를 보면 신체적 건강 및 학업능력은 상위권이나 정신적 웰빙은 최하위권이다.

굳이 그런 통계를 빌리지 않아도 된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연예·결혼·출산을 포기했다는 3포, 3포를 넘어 인간관계, 내 집 마련, 꿈·희망도 포기한다는 N포가 자연스럽게 쓰이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으며 세계에 이름을 떨친 영화 ‘기생충’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꼬집는다.

한국은 사회자본이 약한 사회다. 사회자본은 신뢰·연결망·규범의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는데 한국인의 삶의 질과 행복감이 경제력이나 수명에 비해 낮은 것은 박약한 사회자본이 중요한 이유로 꼽힌다. 의지할 수 있는 친구나 친척이 적고, 기부나 자선 같은 관대함이 부족하며 부정부패가 적지 않다고 인식하는 게 행복지수를 크게 낮춘다.

한국인의 대인 신뢰는 북유럽·북미·호주, 심지어 중국보다 낮다. 한국보다 대인 신뢰가 낮은 나라는 남유럽·남미·북아프리카 일부 국가다 (‘사회자본에 대한 교육의 역할과 정책 방향’, 2017). 1990년대 후반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한국을 중국과 함께 신뢰가 낮은 사회로 꼽았는데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한상의가 2017년 낸 ‘한국의 사회적 자본 축적 실태와 대응과제 연구’를 보면 우리나라의 신뢰·규범·사회 네트워크 등 3대 사회적 자본은 국제사회에서 하위권이다. 대선 주자들은 경쟁적으로 공정을 말하는데 그만큼 우리 사회가 공정치 않다는 얘기다. 세계 10위의 경제 규모 같은 정량적 지표를 중심으로 유엔에서 선진국으로 인정받았지만, 삶의 질과 행복의 측면에선 아직 멀었다. 3포·N포 대신에 꿈과 희망, 성취를 말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그때가 선진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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