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팩트체크

조선 금속활자가 전하는 말…그건 이렇습니다

중앙일보

입력 2021.07.08 00:22

업데이트 2021.07.08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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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혜란 기자 중앙일보 국제팀장
15세기 제작으로 추정되는 한글·및 한자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담긴 항아리가 서울 공평동(인사동) 땅 속에서 나왔다. 사진은 한글 금속활자 세부. [사진 문화재청]

15세기 제작으로 추정되는 한글·및 한자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담긴 항아리가 서울 공평동(인사동) 땅 속에서 나왔다. 사진은 한글 금속활자 세부. [사진 문화재청]

국제팀장에 발령 나기 전 문화팀에서 현장 취재한 마지막 이슈가 서울 인사동에서 출토된 조선 전기 금속유물이었다. 15세기 세종~세조 때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금속활자 1600여점을 포함해 각종 과학기술 발명품이 무더기로 나왔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 표기법을 간직한 한글 금속활자들 외에 한자 금속활자 가운데 일부(최소 8점)는 1434년 주조된 갑인자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사실이라면 제작연대가 확실한 금속활자의 최고(最古) 실물이란 점에서 세계적인 파장이 예상된다.

[노트북을 열며] 조선 금속활자가 전하는 말

여기까진 속된 말로 '국뽕'이 차오른다. 그런데 서양의 구텐베르크가 제작한 금속활자(1440년대)보다 앞선 조선 금속활자가 실물로 확인됐다고 치자. 그런다고 역사가 바뀌는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상업출판의 부흥으로 이어져 서양 지식산업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반면 조선 금속활자는 어땠나. 이번 유물이 나온 인사동 유적지만 해도 중인들의 거주지라 “왕실 등 최고 관청에서만 취급하던 금속제품이 이곳에서 발견된 건 희한한 일”(오경택 발굴조사단장)이라고 했다. 적어도 조선 전기(임진왜란 이전)까지 인쇄술은 중앙통제로 유지됐고 상업출판이 가시화된 것은 18세기 이후란 게 중론이다.

“주자(鑄字)를 만든 것은 많은 서적을 인쇄하여 길이 후세에 전하려 함이니, 진실로 무궁한 이익이 될 것이다.” 세종실록 18권은 이렇게 전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15세기에 나름 꽃을 피웠던 출판‧인쇄문화는 여러 정변과 전쟁, 계급사회의 한계 속에 정체됐고 특히 금속활자 보급은 억제됐다. 한글 창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평전『구텐베르크 혁명』(예지, 2003)의 저자 존 맨이 이렇게 썼을까. “왕(세종)이 직접 뛰어난 총기를 발휘하여 이룬 발명이라 하더라도 보수주의의 무게를 극복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기술적·사회적 변화로 나아가는 계기는 어디에도 없었다.”(156쪽)

“설사 구텐베르크보다 앞선 실물이라 한들 최초·유일은 순간이고 앞으로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 오히려 이들 유물의 가치를 스토리텔링화하고 새로운 콘텐트로 축적해 갈 일이 남았다.” 2007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수십만자의 금속활자 가운데 15세기 한글활자 30여자를 최초로 찾아냈던 이재정 학예연구관의 말이다. 활자 발명도, 발굴도 그 부가가치를 어떻게 창출하느냐에 달렸단 얘기다.

그런 점에서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말도 의미심장하다. “무엇이 낫다 그르다가 아니라 동서양 출판 시스템이 어떻게 달랐고, 각 사회의 욕망과 추구하는 바가 무엇이었나 탐구해야 한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금속활자의 ‘진실’을 후학들이 캐낼 차례다.

그건 이렇습니다 – 금속활자 미스터리 ‘팩트체크’
 최근 서울 인사동 땅 속에서 발굴된 ‘금속활자 1600여점’ 등 금속유물 관련해 여러 정보가 혼재되면서 ‘뭐가 뭔지 헷갈린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취재 기자가 드리는 ‘그건 이렇습니다-팩트체크’! 먼저 확실히 할 것은 이번에 나온 유물들이 더없이 희귀하고 흥미로운, 값진 유물들이란 겁니다. 관련 학계는 물론 문화‧역사‧과학기술 콘텐츠 학계에서 몇 년간 ‘먹을거리’가 쏟아졌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목판본으로 찍었다.[중앙포토]

훈민정음 해례본 목판본으로 찍었다.[중앙포토]

1. 출토된 한글 금속활자는 ‘세종 당시’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훈민정음 창제 당시 한글 활자도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포하며 해례본을 1446년(세종28) 펴냅니다. 당시 해례본은 너무나도 당연히 ‘한문’으로 쓰였습니다. 여기에 한글 음소들이 예로 보일 뿐이죠. 그리고 해례본은 목판본으로 찍었습니다.

2. 훈민정음으로 중국 한자음을 예시하기 위해 1448년(세종30) 간행한 책이 『동국정운』입니다. 동국정운은 큰 글씨는 나무활자(목활자)로, 작은 글씨는 금속활자인 갑인자(1434년 첫 주조)로 찍었습니다. 한글 표기를 예시하기 위한 책이니 한글은 큰 글씨로만 보이는데, 이 말인즉 한글 금속활자가 쓰이진 않았습니다. 다만 동국정운엔 중국음을 표기하기 위해 쓰인 특수한 한글 자음들, ‘ㅱ, ㅸ, ㆆ, ㆅ’ 들이 보이는데 이를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특수자들은 15세기에만 쓰이다 이후 사라져서 시대를 입증하는 ‘지문’ 역할을 하거든요.

훈민정음으로 중국 한자음을 예시하기 위해 1448년(세종30) 간행한 책 『동국정운』. 여기엔 나무활자(목활자)와 금속활자인 갑인자(1434년 첫 주조)가 혼용돼 쓰였다. 한글과 한자 모두 큰글씨는 목활자(녹색 표시), 작은 글씨는 갑인자(붉은색 표시)로 찍었다. [중앙포토]

훈민정음으로 중국 한자음을 예시하기 위해 1448년(세종30) 간행한 책 『동국정운』. 여기엔 나무활자(목활자)와 금속활자인 갑인자(1434년 첫 주조)가 혼용돼 쓰였다. 한글과 한자 모두 큰글씨는 목활자(녹색 표시), 작은 글씨는 갑인자(붉은색 표시)로 찍었다. [중앙포토]

3. 한글 금속활자는 그럼 언제 등장하느냐.세종께서 자신감을 갖고 『월인천강지곡』(1447년 간행)을 펴냈을 때입니다. 가상의 정사각형을 가정하고 그 안에 꽉 채워넣기라도 한 한글 서체들이죠. 이들 책이 한문을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보니 당연히 한자 활자도 같이 쓰였습니다. 이 한자 활자가 갑인자라서 같이 쓰인 최초 한글 금속활자를 두고 ‘갑인자 한글활자’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그런 말은 없습니다. 학계에선 이들 한글 금속활자를 ‘월인천강지곡자’라고 부른답니다. 이렇게 등장했던 최초의 한글 금속활자, ‘월인천강지곡자’는 전해지는 게 없습니다. 이번에 나온 1600여점 금속활자 중 한글활자 600점 가운데도 현재까지론 없습니다. 이게 나타난다면 세종 시기 한글 금속활자의 등장이며, 한글 창제와 우리 금속활자 기술이 만난 첫 사례로서 너무나 뿌듯하고 기적적일 겁니다.

세종이 우리말로 찬불가를 간행한 『월인천강지곡』(1447년)에서 첫 한글 금속활자가 보인다. 학계에선 이를 '월인천강지곡자'(파란색 표시)라고 부른다. 함께 쓰인 한자 활자는 갑인자(붉은색 표시)다. [중앙포토]

세종이 우리말로 찬불가를 간행한 『월인천강지곡』(1447년)에서 첫 한글 금속활자가 보인다. 학계에선 이를 '월인천강지곡자'(파란색 표시)라고 부른다. 함께 쓰인 한자 활자는 갑인자(붉은색 표시)다. [중앙포토]

4. 그럼 이번에 발견된 한글 금속활자는 뭐냐. 중앙일보는 제목에 ‘세종의 숨결’ 운운하지 않았느냐. 이 설명을 드리려고 여기까지 온 건데요. 아까 언급한 ‘ㅱ, ㆆ, ㆅ’ 기억하시죠. 이번에 나온 금속활자 중에 이들이 있었습니다(참고로 ㅸ은 나오지 않은 걸로 확인됐습니다. 문화재청 발표자료에 포함됐는데, 연구자들에게 다시 확인한 결과 자료 실수랍니다). 이 말인즉 이들 한글 활자가 15세기에 쓰인 금속활자란 거죠. 그런데 월인천강지곡 서체와는 다릅니다. 어느 인쇄본을 닮았느냐. 바로 세조가 1461년 펴낸  『능엄경언해』 글자체랑 꼭 같답니다. 불경을 번역한 능엄경언해엔 세조 즉위년(1455년, 을해년)에 만들어진 활자체인 ‘을해자’가 쓰였습니다. (참고로 이러한 활자 이름은 한자가 기준인데, 능엄경언해엔 한자 을해자와 나란히 한글 금속활자가 보입니다). 즉 월인천강지곡 이후에 등장한 버전 2.0 한글 금속활자. 이것이 이번에 출토된 것입니다. 세종 시기가 아니고 세조 시기에 만들어진 활자, 그러나 아버지 세종이 만든 ‘ㅱ, ㆆ, ㆅ’ 등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를 그대로 따르는 활자. ‘세종의 숨결’이 스몄으되 아들이 뜻을 이은, 가장 오래된 한글 금속활자의 무더기 출현입니다.

2007년 국립중앙박물관 역사부 이재정 학예사(당시 직책)가 발견한 한글 금속활자. 세조 시기에 제작한 을해자 병용 한글활자다. [중앙포토]

2007년 국립중앙박물관 역사부 이재정 학예사(당시 직책)가 발견한 한글 금속활자. 세조 시기에 제작한 을해자 병용 한글활자다. [중앙포토]

5. 그렇다고 을해자 한글 활자의 첫 등장이냐, 그건 아닙니다. 실은 을해자는 한자 활자는 하나도 안 남아있는데 한글 활자가 30여자 전해져왔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중박)에 소장돼 있죠. 중박에는 수십만자의 금속활자가 전해지는데, 모두 17, 18세기 이후 것들이고, 이 을해자 한글활자들만 예외입니다. (이를 제외하곤 조선 전기(임진왜란 전)에 만들어진 금속활자 실물은 한자도, 한글도, 이번 발굴 전까진 없었습니다.) 을해자란 걸 어떻게 확인하느냐? 『능엄경언해』 글씨체와 꼭같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번에 나온 한글 금속활자도 능엄경언해 을해자라며? 그렇습니다. 같은 시기 활자일 가능성이 크죠. 그러니 월인천강지곡자를 제외하고 가장 오래된 한글 금속활자가 ‘처음’ 나왔다고 해도 어폐가 있습니다.
다만 대량으로 출토된 건 처음입니다. 600점 중의 상당수가 엉겨붙고 판독이 안된다고 해도 초창기 한글 활자가 이렇게 다채롭게 등장하다니요. 동국정운식 표기는 물론이고 한글 토씨를 이어서 인쇄한 ‘하니’ ‘하고’ 등의 연주활자도 10여점, 16세기까지만 쓰인 주격조사 ‘ㅣ(이)’도 첫 출토됐습니다. 게다가 중박 소장 을해자 한글활자는 크기상으로 ‘소자’에 해당하는데 이번엔 대자, 중자, 소자, 특소자까지 다 나왔습니다. 훨씬 확인‧연구할 수 있는 게 많아졌죠. 백두현 경북대 교수는 “출토 활자를 거듭 재확인하다보면 혹시 ‘월인천강지곡자’가 나오지 않을까 한다”는 기대감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바로 국보 지정 고고, 아시죠?!

15세기 제작으로 추정되는 한글·및 한문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담긴 항아리가 서울 인사동 땅 속에서 나왔다. 사진은 '하며' '하고' '이나' 등 한글토씨 두개를 한번에 주조한 연주활자들. [사진 문화재청]

15세기 제작으로 추정되는 한글·및 한문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담긴 항아리가 서울 인사동 땅 속에서 나왔다. 사진은 '하며' '하고' '이나' 등 한글토씨 두개를 한번에 주조한 연주활자들. [사진 문화재청]

6. 그런데 세종 시기 활자가 나왔다던데, 뭐가 어떻게 된거야? 세종 시기의 갑인자로 추정되는 활자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글은 아니고 한자 금속활자입니다. 일부 보도에서 갑인자 1000점 출토라고 썼던데, 황당한 오보고요, 전체 한자 금속활자 1000점 가운데 갑인자는 8점 정도로 추정됩니다. 나머지는 을해자(1455년), 을유자(1465년) 등이 대부분입니다. 갑인자라면 1434년 처음 주조한 기록이 있고, 이번에 나온 활자가 초주갑인자로 찍어낸 1436년 『자치통감』 서체와 일치한다니, 사실이라면 대박이죠. 주조 연대가 확실한 금속활자의 첫 출현이니까요. 아시다시피 우리는 세계 최초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체요절(직지심경)』(1377)을 배출한 나리입니다. 다만 이건 인쇄본으로만 전해지죠.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든 건 1440년대이고 이걸로 찍어낸 가장 오래된 성경이 1455년 것입니다. 만약 이들 8점이 갑인자로 확인된다면 우리는 금속활자에 관한 한 ‘첫 인쇄본’과 ‘사실상 첫 활자’를 동시에 갖게 되는 겁니다.

7. 사실상 첫 활자라니, ‘사실상’은 왜 붙이는 건데? 그건 조선 금속활자 갑인자에 앞서 우리가 이미 고려 금속활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죠. 중박 소장 ‘복’자가 고려 무덤에서 출토됐다고 하고 북한도 몇 년 전 만월대에서 고려 금속활자 여러점을 발굴했다고 선전했습니다. 다만 이런 활자들은 연대를 입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세계 최초 금속활자 실물’로 인정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갑인자는 만들어진 기록과 찍어낸 인쇄본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세계 첫 실물 금속활자’로 공인받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물론 후행연구가 면밀히 진행돼야겠지만요.

서울 인사동서 가장 오래된 한글활자 발견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서울 인사동서 가장 오래된 한글활자 발견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8. 그런데 이 활자들, 왜 땅속에서 나왔지? 같이 나온 금속유물들은 뭐지? 이 부분은 저도 기사 썼고, 다른 분들도 상상력을 많이 발휘한 ‘미스터리’로 남아있지요. 확실한 건 이 금속유물들이 왕실 혹은 최고 관청에서 취급 가능했던 것들이란 점. 그런데도 발견된 곳은 중인들이 거주하던 지역 창고터라는 것. 그리고 의도적으로 유물들을 모두 분질러서 항아리에 넣었단 겁니다. 당시엔 금속이 귀했으니 이걸 녹여서 재활용하려 했을 수 있죠. 실제로 조선 전기 금속활자가 남아있지 않은 이유가 쓰다가 녹여서 다시 만들고 했기 때문이거든요. 혹은 전쟁 등 변고를 앞두고 이 유물들이 ‘적들’의 손에 온전히 전해지지 않게 일부러 부러뜨려 넣었을 수도 있죠. 그러다가 전란이 끝났는데도 항아리 주인 혹은 항아리를 묻은 위치를 아는 ‘미션 가이’는 돌아오지 못했던. 그렇게 잠든 항아리가 약 500년 후에 인사동 오피스빌딩 건립 전 기초조사 때 발견됩니다. 그 사이 일제 침탈, 6.25 전쟁, 새마을운동 등등으로 얼마나 많은 파헤치기와 불도저 개발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지하 층층이 아래서 잠들고 있던 항아리가 2021년 6월에 깨어났습니다. 이걸 묻었던 주인은 이제 마음이 놓이려나요. 그분의 영전에 술이라도 한잔 올리고픈 마음입니다. 어떤 이유에서 묻었든, 약 500년 전 블랙박스가 후대 한국인들에게 무한한 탐구거리를 열어줍니다.

사진제공 및 도움말: 백두현 경북대 국문학 교수,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관리학 교수, 이승철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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