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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 읽기

공정의 50가지 그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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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

정치와 도덕을 주제로 삼는 생존 철학자 중에 현재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이는 마이클 샌델일 게다. 그다음은 아마 프린스턴대 명예교수인 해리 프랭크퍼트 아닌가 싶다. 프랭크퍼트는 2005년 현대 정치와 미디어를 비판한 『개소리에 대하여』라는 얇은 책을 냈는데 많은 공감을 얻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27주 동안이나 올랐다.

모두가 원하고 누구도 모른다 #인류보다도 더 오래됐을 개념 #지금 필요한 건 섬세함일지도

진중하고 두툼하게 쓰는 샌델과 달리 프랭크퍼트는 도발적인 아이디어를 짧은 에세이로 발표하기를 즐기는 모양이다. 『개소리에 대하여』를 내고 꼭 10년 뒤, 그는 얇은 교양서 한 권을 또 출간했다. 『평등은 없다』라는 제목이다. 노(老) 철학자는 여기서 ‘경제적 평등은 도덕적으로 중요한 목표가 아니다’라는 경악할 만한 주장을 펼친다.

솔직히 프랭크퍼트 정도 되는 학자가 정색하고 얘기하니까 들어볼 마음이 생기지, 다른 사람이 한다면 미친 소리 취급당할 말이다. 아니, 그렇다면 어마어마한 빈부 격차도 괜찮다는 소리냐? 프랭크퍼트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황당해하는 독자들에게 그는 싸움이라도 걸듯 자기의 논거를 공격적으로 제출한다.

우리의 도덕적 목표는 좋은 삶이다. 우리는 남보다 우월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나쁜 삶을 피해야 하는 이유는 그게 남보다 못한 삶이어서가 아니다. 그 자체로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 개인이나 사회가 추구해야 할 도덕적 목표는 평등과 별개로 존재하며, 그렇기에 ‘불평등은 그 자체로는 비난받을 만한 것이 아니다.’ 고로 ‘경제적 평등은 반드시 실현해야 할 도덕적 이상이 아니다.’ 작은 따옴표 안의 문구는 책에서 그대로 옮긴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우리가 용납해서는 안 될 인간 존엄에 대한 훼손이 발생한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불평등 축소를 요구할 수는 있다. 말하자면 평등주의에는 근원적 가치는 없지만 도구적 가치는 있다. 그래도 더 중요한 것은 나쁜 삶 자체를 막는 일, 즉 범죄와 빈곤을 없애는 것이다. 이상이 프랭크퍼트의 논지다.

나는 이 책을 두 번 정독했는데 이게 궤변인지 아닌지 여전히 헷갈린다. 다만 철학 논증 속 인간과 진짜 인간이 매우 다르다는 점만은 잘 안다. 사람은, 논리야 어떻건 간에 남의 삶을 열심히 살피고, 거기에 큰 영향을 받는다. 소득이 비슷해도 부자 나라에서 서민으로 사는 것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중상층으로 사는 게 훨씬 더 만족스러울 수 있다.

평등에 대해 파고들수록 그게 매우 복잡한 개념이며, 때로 논의가 반직관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동시에 그에 대한 욕구는 반대로 거의 원시적인 감정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평등이 뭔지 잘 모르면서 그것을 열렬히 소망한다. 사랑·행복·구원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프랭크퍼트에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의 말이 이상하다고 ‘느낀다’.

공정 개념은 평등과 상당 부분 겹친다. 우리는 공정을 실현하는 과정과 그 결과가 평등에 대한 우리의 감각과 어긋나지 않기를 바란다. 평등 개념 자체가 모호하므로 공정에 대해서도 막연하게, 하지만 강력하게 요구한다. 아마 그런 감각과 욕구는 인류보다 더 오래됐을 것이다. 불공정하게 보상하면 실험실 침팬지도 화를 낸다.

공정이라는 혼란스러운 광원은 하나의 사안에도 수십 가지 그림자를 드리운다. 우리는 그 빛의 방향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그걸 좇다 도리어 길을 잃기도 한다. 괜찮은 정규직과 나머지 일자리로 노동시장이 이원화된 지 한 세대가 지났다. 좋건 싫건 이를 한국 사회의 질서라고 인정하고 대처한 이들에게 공기업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심각한 반칙이다.

아직도 한국 사회는 장관과 4대 권력기관장 중에 호남 출신은 몇이고 비서울대 출신은 몇인지 수를 센다. 공정과 부족주의의 기묘한 만남이다. 청와대는 청년세대도 그렇게 하나의 부족이라고 오해한 듯하다. 그래서 구성원 한 사람을 발탁하는 걸 좋은 대책이라고 여긴 것 같다.

차라리 공정이라는 무지막지한 빛보다, 그 그림자들이 어떤 땅에 떨어지는지를 살피는 편이 슬기롭겠다. 선거 공천에서 여성과 청년 할당제를 없애는 게 더 공정한가? 그 선거가 이번 야당 대표 선거처럼 사회적 거리 두기 중에 미디어 중심으로 펼쳐지는 공중전인지, 끈끈하게 지역 조직 잘 관리하는 사람이 유리한 백병전인지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다. 지성도 참을성도 바닥을 보이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덕목이 섬세함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