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오래]우리나라 장구춤을 라벨로 쓰는 부나하븐1988 위스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127)  

검은 원기둥 모양의 큰 가죽 가방을 맨 여성이 가게로 들어온다. 가녀린 그녀의 체형에는 어울리지 않는 큰 가방. 뒤로 질끈 묶은 긴 머리가 주는 강렬함이 아니었다면 도무지 저 큰 가방을 들 수 없었으리라는 생각조차 든다. 아주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조심스레 가방을 내려놓는 그녀. 아직 앳된 티가 역력하다.

"어서 오세요. 물부터 한 잔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시원한 맥주 한 잔 주세요."

“저희 가게는 생맥주는 없고 병맥주만 팝니다만, 혹시 좋아하는 브랜드가 있으십니까?”

"음, 맥주는 잘 모르는데요. 시원한 걸로 하나 추천해주시겠어요?”

바테이블 아래에 있는 작은 냉장고에서 필스너 우르켈을 꺼내 전용잔과 함께 그녀에게 건넨다.

“시원하게 드시기에는 이만한 게 없습니다.”

잔에 맥주를 가득 따른 후 절반 정도를 단숨에 해치운 그녀. 매고 온 큰 가방이 그녀의 몸을 메마르게 한 걸까.

“역시 맥주 한 잔 마시니까 살 것 같네요. 한동안 금주를 했거든요.”

“오랜만에 마시는 맥주는 정말 맛있죠. 그런데 무슨 일로 금주를?”

“제가 사실 전통악기를 전공하고 있거든요. 이 가방 안에 뭐가 들어있는 거 같으세요?”

“사실, 아까 들어오실 때부터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했거든요. 전통악기라는 힌트를 들으니까 뭔지 알 것 같네요. 장구죠?”

“네! 맞아요.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저는 어려서부터 장구를 쳤어요. 어머니가 장구를 치셨는데, 그 모습에 반해서요. 대학도 전통예술학부에 들어가서 장구를 쳐요.”

어머니를 따라 장구재비가 된 그는 장구를 치다 보면 모든 생각이 사라지는 때가 있다고 말했다. 어머니와 한 무대에서 장구판을 벌여보는 게 꿈이다. [사진 piqsels]

어머니를 따라 장구재비가 된 그는 장구를 치다 보면 모든 생각이 사라지는 때가 있다고 말했다. 어머니와 한 무대에서 장구판을 벌여보는 게 꿈이다. [사진 piqsels]

그녀의 꿈은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유명 국악패에서 장구재비로 이름을 날리던 그녀의 어머니. 그녀는 어머니를 따라 전국을 돌며 국악에 흠뻑 빠졌다. 어머니는 딸이 대를 이어 장구 치는 걸 반대했지만,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음악을 연주한다기보단 한국인의 ‘한’을 연주한다고 할까요? 장구를 치다 보면 모든 생각이 사라지는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정말로 넋 놓고 제 마음대로 쳐요. 그런데 공연 녹음한 걸 들어보면 악기의 합이 어찌나 그렇게 잘 맞는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정서가 이끌어내는 힘 같아요.”

그녀는 공연을 위해 술을 끊었다. 철저한 자기 관리로 장구 치는 실력 뿐만 아니라, 외모에도 최선을 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식단조절, 운동, 금주. 이 세 가지를 대학생이 된 뒤에도 꾸준히 실천했다. 실력과 외모를 동시에 갖춘 장구재비는 어느 공연에서나 주목을 끌었다. 한 기사에서는 그녀를 ‘한국 장구의 미래’로 소개하기까지 했다.

“저도 이제 내년이면 졸업이라 국악패에 들어가기로 했어요. 꿈에 그리던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요.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더라구요. 어머니 국악패가 블랙리스트에 올라갔다고. 공연 중에 정부에 대한 비판을 한 게 이유라는데요. 해학과 풍자는 국악의 기본이거든요. 아무튼 그래서 요즘 많이 힘들어졌대요. 행사 섭외도 거의 안 들어오고요.”

그저 열심히 장구를 치고 자기 관리를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줄 알았기에 블랙리스트로 인한 충격은 더 컸다. 어머니는 걱정 말라면서도 넌지시 다른 국악패로 가는 건 어떤지 물어왔지만, 그녀는 격렬히 반대했다. 어머니와 한 무대에서 장구판을 벌여보는 게 꿈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그래도 요즘 들어 좀 흔들리는 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오늘 여기도 온 거구요. 술이라도 마시면 좀 나을까 싶거든요.”

부나하븐 1988. [사진 김대영]

부나하븐 1988. [사진 김대영]

백바에서 위스키 보틀을 하나 꺼낸다. 선홍빛 치마저고리에 장구를 둘러매고, 장구채를 두 손에 쥔 여성이 하늘색 하늘 아래 서 있다.

“이 그림이 뭘로 보이시나요?”

"어머! 이거 장구춤이네요? 그림이 너무 예뻐요. 당장이라도 장구채로 장구를 내리칠 것 같아요. 이건 무슨 술이길래 장구춤 그림이 그려져 있죠?"

"위스키입니다. 한 회사에서 전세계의 춤을 주제로 위스키 라벨을 만들었어요. 탱고, 발레, 플라멩고, 폴댄스, 탭댄스, 밸리댄스 등 여러 가지 춤이 있죠. 그 중에서 한국 춤으로 선정된 게 바로 이 장구춤입니다. 위스키는 부나하븐이란 증류소 위스키인데, 1988년에 증류해 28년 간 숙성했습니다."

"위스키요? 위스키 라벨에 장구춤이 들어갈 거라곤 상상도 못해봤어요. 이걸 만든 사람은 어떤 생각으로 장구춤을 썼을까요?"

"저도 거기까진 모르겠습니다만, 둘 중 하나가 아닐까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춤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장구춤이었거나,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춤을 떠올렸을 때 장구춤이 떠올랐거나. 어찌됐든 이 위스키를 만든 사람은, 장구춤이 28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친 고급 위스키를 장식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예술은 블랙리스트 같은 걸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