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출마선언에서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최소한의 생활을 하지 못하는 국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특히 아이들이 충실한 돌봄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이 전 대표가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말이다. 그는 “만 3,4세일 때 부모의 소득이 아이의 교육을 결정하고, 교육 기회의 불평등이 인생을 가른다”고 자주 말한다. 이런 생각의 배경엔 찢어지게 가난했던 이 전 대표의 어릴적 아픔이 있다.
이 전 대표는 1952년 1월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부의 7남매 중 장남이었다. 원래 10남매였으나 두 형과 한 명의 여동생이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 농사를 지었지만 소 한 마리 없는 집이었다. 배가 고파서 물배를 자주 채웠다.
공부를 잘 했던 소년 이낙연은 중학생 때부터 광주로 유학을 가 광주북중학교와 광주제일고를 다녔다. 중학교 3년 동안 일기를 썼는데 시골에 사는 동생들에 대한 미안함, 장남의 책임감 등을 잔뜩 적었다. 이낙연의 소년 시절 별명은 ‘메주’ ‘생영감’이었다.
1970년 서울대 법과대학에 입학할 때 이 전 대표의 아버지는 “등록금은 어떻게든 보내줄테니 먹고사는 것은 알아서 하라”고 선언했다. 이 전 대표는 청년 시절에 끼니를 자주 굶어서 “시체처럼 말랐었다”고 말했다. 몸무게는 50kg, 배꼽이 등에 닿을 정도의 24인치 허리였고, 영양실조 초기 증상을 겪었다. 잘 곳이 없어서 친구들의 하숙집을 돌아가며 며칠씩 묵었다고 한다.
청년 이낙연에게 “입대 영장은 숙식이 해결되는 탈출구”였다고 이 전 대표는 대담집 『이낙연의 약속』에서 말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육군에 입대해 카투사로 복무했다. 그는 “웃통을 벗었을 때 갈비뼈가 안 보인 건 그때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전역 후 친구의 지원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했다가 7개월 만에 포기했다. 그는 “고향에 있는 동생들에게 미안해 느긋하게 고시를 준비할 여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1979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이 전 대표는 21년간 기자로 근무했다. 정치부 기자로 주로 일하면서 옛 민주당인 동교동계를 출입하다가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가까워졌다. 1990년 DJ가 기자 이낙연에게 보궐선거에 출마하라고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하고 도쿄 특파원행을 택했다. 이 전 대표는 당시 “내가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진작 유학을 했을 텐데 그럴 형편이 못 된 터에 회사에서 외국을 보내주는 기회를 놓치는 게 아까웠다”고 말했다.
아내 김숙희 여사와는 1980년 결혼했다. 맥줏집 주인 아주머니의 중매로 당시 미술 교사였던 아내를 만났다. 서울 봉천동의 단독주택 2층 280만원짜리 전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열 번 넘게 이사를 다니다가 신반포의 13평 아파트를 처음 샀다. 아내를 소개해준 아주머니가 와서 보고는 “집이 너무 초라하다”고 해서 속상했다고 회고했다. 1982년 아들을 낳고 자라는 걸 볼 때는 김숙희 여사가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행복한 시기였다.
DJ의 제안을 받은 뒤 10년이 지난 2000년 이낙연은 16대 총선에 고향 전남 함평·영광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내리 4선을 했다. 초선 의원 때 새천년민주당 대변인,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대선 후보와 당선인 대변인 등 대변인만 5번 거쳤다.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질 때 당에서 탈당자가 나오자 이낙연 당시 대변인이 “지름길을 모르거든 큰 길로 가라”고 말한 논평이 화제가 됐다.
2014년 전남지사 선거에 당선된 뒤 임기 중이던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에 임명됐다. 총리 시절 대정부질문에서 야당의 공세를 촌철살인 언변으로 막아내며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민주화 이후 최장 총리로 퇴임한 뒤 2020년 21대 총선에 출마해 서울 종로구에서 5선 의원이 됐고, 같은 해 전당대회에서 민주당 대표에 선출됐다. 5일 대선 출마에 나서면서 그는 “금수저, 흙수저가 세습되지 않도록 하겠다. 중산층을 70%로 늘리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