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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맞짱 뜬 윤석열·이재명…“서로 다급했기에 때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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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윤석열(왼쪽) 전 검찰총장과 이재명 경기지사. 중앙포토

윤석열(왼쪽) 전 검찰총장과 이재명 경기지사. 중앙포토

“난 무조건 한 놈만 패.”

당 안팎서 집중 견제받는 두 주자 #역사 논쟁으로 국면 전환 효과 #정치권에선 “적대적 공생” 분석

영화 ‘주유소 습격 사건’의 대사로 유명한 이 말은 정치권에선 “난 무조건 센 놈만 패”로 변형돼 사용되곤 한다. 쓸 수 있는 자원은 한정된 상황에서 굳이 힘을 써야 한다면 강한 사람을 비판해야 효과적이란 이유에서다. 강자와의 싸움은 무용담으로 인정받지만 약자와의 싸움은 추태로 비판받는 일도 잦다.

내년 3·9 대선을 8개월여 앞둔 정치권의 관점에서 볼 때 현재 강자는 미래 권력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차기 대선 주자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1·2위를 다투고 있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이재명 경기지사다. 그래서 윤 전 총장과 이 지사는 당 안팎의 많은 경쟁자에게 집중 견제를 받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서로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던 두 사람이 지난 4일 처음으로 충돌했다. 이 지사가 지난 1일 “대한민국이 (정부 수립 당시) 친일 청산을 못하고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사실 그 지배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았느냐”고 말한 걸 윤 전 총장이 사흘만인 지난 4일 “국정을 장악하고 역사를 왜곡하며 다음 정권까지 노리고 있는 당신들은 지금 무엇을 지향하고 누구를 대표하느냐”고 직격하면서다. 그러자 이 지사는 “새로운 정치를 기대했는데 처음부터 구태 색깔 공세라니 참 아쉽다”고 재반박했다.

윤석열·이재명, 역사관 극명하게 갈리며 정치적 파장

당장 정치권엔 큰 파장이 일었다. 역사관, 그것도 대한민국 건국에 관한 역사적 시각이 극명하게 갈리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공방은 이틀날인 5일에도 이어졌다. 윤석열 전 총장은 이날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와 면담한 뒤 취재진과 만나 “색깔론, 이념 논쟁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면서도 “적어도 국가의 최고 공직자로서 국가의 중요한 것을 결정할 지위에 있거나 희망하는 분들이라면 그래도 현실적으로 실용적인 역사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나라를 운영해야 한다”고 재차 이 지사를 겨냥했다.

갑자기 발발한 두 사람의 ‘역사 전쟁’을 둘러싸곤 전문가마다 평가가 갈린다. 게중엔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는 “2030세대, MZ세대의 경우 (이런 문제를 거론하는 것에) 비판적이기 때문에 이재명 지사의 명백한 전략적 실수로 본다”며 “윤석열 전 총장으로서는 당연한 말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이강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소장은 “윤 전 총장으로서는 단기적으로는 이 지사의 ‘점령군’ 발언에 응수하는 게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며 “하지만 중도와 (민주당 지지층에서) 이탈한 진보까지 외연 확대의 대상으로 삼겠다고 선언한 윤 전 총장이 국민의힘과 똑같이 대응하는 건 장기적으로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장군. 중앙포토

이승만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장군. 중앙포토

반면 정치권 일각에선 두 사람의 역사 전쟁을 ‘두 사람 모두에게 나쁘지 않은 의도된 충돌’로 보는 시각도 있다.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대선경선기획단장은 이날 KBS 라디오 인터뷰에서 “(윤 전 총장이) 가족 악재를 색깔론으로 터닝해서 공격하는 모양새”라며 “(시선을) 밖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상대 후보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의힘 관계자도 “윤석열 전 총장은 출마 선언 이후에 지금 마땅한 메시지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 지사를 공격한 건 잘한 일”이라며 “윤 전 총장과 이 지사는 나름대로 공생 관계이고, 전략적 동거를 할 수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윤석열, 부인·장모 논란 수세 몰렸다 탈출 계기

윤 전 총장이 지난달 29일 정치 참여 선언을 한 다음날 부인과 관련한 이른바 ‘쥴리’ 논란이 불거졌다. 특히 지난 2일엔 장모 최모씨가 요양급여 부정수급 혐의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구속됐다. 윤 전 총장으로선 이 지사의 ‘친일, 점령군’ 발언이 수세 국면 탈출의 계기가 됐다는 분석이다.

반대로 민주당 대선 경선을 치르고 있는 이 지사로서도 나쁘지 않은 그림이란 의견도 있다. 대선 1·2위 주자 간 직접 충돌이 정치권의 핫이슈가 되면서 이 지사에 대한 당내 경쟁자들의 견제가 상대적으로 주목을 끌지 못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이상일 케이스탯컨설팅 소장은 “이 지사는 대표 브랜드인 기본소득 논쟁이 정체돼 있는 상황에서 다른 이슈를 꺼낸 셈”이라며 “(윤 전 총장과 이 지사) 두 사람 모두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새로운 활로를 뚫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유력 후보 간의 격돌이라는 게 정치적인 주목도와 파장이 크다 보니 각자 진영 내의 다른 경쟁자들에게 돌아갈 관심을 두 사람이 흡수하는 부수적 효과도 얻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 지사는 5일 밤 페이스북에 역사 문제 대신 윤 전 총장의 장모 최모씨 사건을 거론했다. 이 지사는 “6년 전에는 기소도 안 됐던 분(최씨)이 이제야 구속된 과정에 윤 전 총장이 개입했는지 여부도 중요하다”면서도 “이번 논란이 누구의 장모냐보다 사무장 병원의 폐해를 밝히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적었다. ‘본질’을 강조했지만 결과적으론 윤 전 총장의 ‘아픈 부분’을 거론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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