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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공무원생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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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차세현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차세현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차세현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슬기롭다’는 말은 사리를 바르게 판단하고 일을 잘 처리한다는 뜻이다. 이 단어엔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좋은 결과를 만들고 싶다는 희망의 메시지도 담겨 있다. 어느 조직에 속해있건 사람들은 슬기로운 조직생활의 해피엔딩을 꿈꾸기 마련이다. 요즘 같은 제목의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이유일 테다.

윤석열·최재형은 대선·정치 도전 #산업부 공무원은 감방 가야할 처지 #‘공무원 정치중립성 보장’ 헌법 7조 #사문화 막아야 공직사회 숨통 트여

문재인 정부 공무원도 슬기로운 공무원 생활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예전만큼 녹록지 않다.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거나 교도소 담장 위를 걷고 있다는 말은 그동안 정치인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최근 헤드라인을 장식한 뉴스를 보면 이젠 공무원도 비슷한 처지인 세상이 된 것 같다.

지난주 두 명의 고위 공무원이 정치 도전을 선언하거나 대한민국의 앞날을 위해 숙고의 시간을 갖겠다고 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판사 출신의 최재형 전 감사원장 말인데, 그들에게 슬기로운 공무원 생활의 끝은 정치일 것 같다.

물론 대한민국에서 고시 패스한 수재치고 대통령병을 앓아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 21대 국회의원 300명 중 법조인 출신은 46명이다. 늘 과다 대표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두 공무원의 케이스는 유별나다. 대통령이 임명한 공무원이 그 정권의 법치주의 무시와 반민주적 행태에 반발하면서 정치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윤 전 총장은 국민을 약탈하는 현 정권의 연장을 막아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 그나마 유사 사례가 있다면 97년 대선에 나선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다. 그렇지만 김영삼정부 당시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그는 야권이 아닌 여권 대선 후보였다.

서소문 포럼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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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지난주 두 명의 다른 공무원은 직권남용과 업무 방해, 배임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됐다. 산자부 엘리트 공무원이었던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과 채희봉 전 청와대 산업정책비서관. 만약 법원의 유죄 판결이 나오면 이들은 앞으로 ‘슬기로운 감방생활’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윤 전 총장과 최 전 원장이 대권에 도전할 줄 몰랐던 것처럼 이들은 현 정부 출범 전만 해도 자신들에게 이런 일이 닥칠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임기 5년 차, 각 부처의 잘 나가는 공무원들이 지난 4년여간 기록해놓은 업무수첩을 꼼꼼히 챙기고 있다는 말이 돌고 있다. 업무수첩엔 청와대 또는 부처 상관으로부터 위법하거나 부적절한 지시를 받은 날짜와 구체적인 내용, 그 지시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실제 업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등이 적혀 있다고 한다. 정권이 교체될 경우 혹시 모를 직권남용과 업무방해의 덫을 피하기 위한 공무원들의 ‘슬기로운 자구책’인 셈이다.

한쪽은 정권의 전횡에 맞서 야권 대선후보의 길을 걷고, 다른 쪽은 정권의 요구에 순응해 감옥에 갈지도 모르는 비정상적인 상황. 드라마를 만든다면 ‘슬기로운 공무원 생활’은 ‘슬기로운 의사 생활’과는 달리 막장이나 반전 드라마가 될 것 같다.

최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대한민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했다. 1964년 설립 이후 57년만의 첫 케이스라는데 영 입맛이 씁쓸하다.

얼마 전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개최한 영국은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다. 의원내각제 국가인 영국은 정치인 출신 장관(secretary와 minister)과 고위공무원(mandarin)의 역할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정권 교체에 따른 급격한 정책 변화를 막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공무원의 역할을 법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내용이 의미심장하다.

“공무원은 지속해야 하며(perpetual), 정치적으로 편파적이지 않아야 하며(politically impartial), 현 정부를 위해 일하면서도 동시에 다음 정부를 위해 (정책의) 유연함을 갖고 있어야 한다.(retain the flexibility to serve future governments)”

과연 대한민국 공무원 사회는 선진화됐나. 오히려 ‘공무원은 특정 정치세력이 아닌 국민에게 책임을 지며, 이를 위해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로 보장된다’는 헌법 7조가 사문화되고 있는 게 아닐까. 대한민국 공무원의 슬기로운 생활을 위해 이젠 숨 쉴 공간을 만들어줘야 하는 게 아닐까. 드라마 속 의사들이 격무를 마치고 밴드에 몰입한 후 다시 열정적으로 일하는 것처럼 말이다. 대한민국엔 다음 정부도, 그다음 정부도 들어설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