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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건축가 이일훈의 다른 생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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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청춘(靑春)!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이 문장을 기억하십니까?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접했던 민태원(1894~1935)의 수필 ‘청춘예찬’입니다. 10대 ‘청춘’ 시절에 ‘청춘’이 뭔지도 잘 모른 채 읽었던 글인데요, 인제 와서 작가 민태원의 생몰연대를 다시 살펴보니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마흔을 갓 넘긴 나이였더군요.

갑자기 이 글이 떠오른 것은 폐암으로 투병하다 지난 2일 세상을 떠난 건축가 이일훈(후리건축연구소 대표) 선생 때문이었습니다. ‘건축계 최고의 글잡이’로 꼽히는 이일훈 선생은 생전에 열정적으로 일상의 환경을 돌아보게 하는 내용의 저서를 꾸준히 냈는데요, 10년 전 그가 쓴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사문난적)는 책의 첫 장을 “숲! 생각만 해도 가슴이 들뜨는 말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숲 예찬서’입니다. “숲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말이다. 그 자체로 완성된 세계를 보여준다”고요.

고(故) 이일훈 건축가가 설계한 인천 숭의동 성당(2021). 이 성당은 그의 유작이 됐다. [사진 노경 사진작가]

고(故) 이일훈 건축가가 설계한 인천 숭의동 성당(2021). 이 성당은 그의 유작이 됐다. [사진 노경 사진작가]

책에서 ‘숲에서 배우는 지혜로 도시를 생각하자’고 주장한 그에게 숲이란, ‘관계성의 총체’를 의미합니다. 식물과 동물의 관계, 자연과 인간의 관계, 죽어가는 것과 살아가는 것들의 관계···. 그 관계를 존중한다면, 도시 안에도 어디 한 군데쯤은 “손대지 않는 공간”“자연에 맡기는 영역”을 확보하고 가장 자연스러운 숲다운 숲을 가꾸는 게 필요하다는 게 그의 주장입니다.

그에 따르면, 숲다운 숲은 획일화와 거리가 멀고, 공간의 경계 또한 없습니다. 과하게 포장하지도 않습니다. 공원을 만든답시고 흙길을 죄다 아스팔트로 덮어버리고, 뒷동산 꼭대기까지 ‘무늬만 목재’인 플라스틱 데크를 깔고 계단으로 덮어버린 것은 가짜 숲입니다. 사람들은 산길마저 편한 길을 좋아하지만 “울퉁불퉁한 산길은 불편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얘기이지요.

넓은 공공 오픈 스페이스(public open space) 확보가 사회적 삶의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라고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아파트에 살고, 고시원 같은 비좁은 공간에 사는 젊은이들이 많은 도시일수록 근린공원 같은 녹지가 “넓을수록, 많을수록 미래를 위해 좋다”고요.

그가 말했듯이 좋은 도시란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도시입니다. 자연이 그립다면서, 숲이 좋다면서 작은 불편도 감수하지 못하고 자연 그 자체를 못 견뎌 하는 우리네 삶을 그는 누구보다 많이 안타까워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 30대 시절 찾았던 프랑스에서 르 코르뷔지에(1887~1965)가 설계한 롱샴성당 안에서 감동 받아 펑펑 눈물을 흘렸다던 건축가 이일훈. 사람과 건축이 바뀌려면, 그리고 도시가 바뀌려면 먼저 사람들의 생각이 변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떠났습니다. 그의 ‘다른’ 생각이 몇 권의 책, 또 여러 채의 건축물로 남았습니다. 그가 말한 숲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보는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