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요새도 장기판에 훈수 두나요?

중앙일보

입력 2021.07.05 13:00

[더,오래] 홍미옥의 모바일 그림 세상(78)

딱! 딱! 딱!
모여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사뭇 심각하다. 서늘함과 아슴아슴한 어둠이 묘하게 어우러지는 시장 옆 작은 공원, 이 시간이면 유난히 이런 소리가 울려 퍼진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오늘도 뜨거운 승부 한판

동네공원에는 언제나 뜨거운 승부가 벌어진다. 장기열전에서 찾은 노년의 일상을 그려 보았다. 〈해질녘 승부 한 판〉, 아이패드. [그림 홍미옥]

동네공원에는 언제나 뜨거운 승부가 벌어진다. 장기열전에서 찾은 노년의 일상을 그려 보았다. 〈해질녘 승부 한 판〉, 아이패드. [그림 홍미옥]


삼 개월째 쉬지 않고 달성공원 동물원을 찾는다
짐승들은 눈치도 없고
빈둥거림은 피장파장이다
어쩌면 구경꾼이 된 내가 저들 눈에 비추어진 동종의 몰골이다
할 짓이 없어 야바위꾼의 장기판에 훈수를 두다가
고래등 같은 고함에
슬그머니 등을 돌린다
회전목마를 탄 아이들은
풍선을 들고 뜀박질인데
빈 주머니에는 동전 몇 개가 달랑거린다

- '실직' 전진식

시인 전진식의 시 ‘실직’에서 묘사되는 장기판은 야속하기만 하다. 안 그래도 스스로 ‘빈둥거린다’는 생각에 서글플 화자를 더욱 주눅 들게 한 장기판의 호통이 밉다. 시를 읽는 독자도 더불어 머쓱해진다. 그저 남아도는 시간이 야속한 실직자의 눈에 보이는 장기판은 잠시 흥미로웠다가 야속함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오늘도 동네 장기판은 뜨겁게 펼쳐지고 있다. 때론 격렬하게 때론 부드럽게!

옆 동네 지하철역 주변엔 작은 재래시장이 있다. 작은 규모지만 언제나 오가는 사람들로 심심할 틈이라곤 없다. 일년 365일을 우리 가게 채소가, 우리 과일이 제일 싸고 맛있다고 외쳐대는 아저씨가 있다. 바로 건너편 과일가게 총각도 질세라 목청을 높인다. 아니라고, 우리 과일이 최고라며 손님을 불러 모은다. 자칫 감정이 상할 법도 한 상황이지만 아이들처럼 내 것이 최고라고 번갈아 외치고 웃는다. 장보기에 나선 사람들도 덩달아 재밌어지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아닌 게 아니라 단돈 7000원에 탐스러운 토마토 한 바구니와 무겁도록 커다란 바나나 한 송이를 사기도 했다. 5000원짜리 냉장고 바지를 파는 쌀집(여기야말로 진정 새로운 편집숍인가?) 옆엔 근린공원이 있다.

설립 취지대로 지역주민의 정서 함양에 도움이 될 만하게 아기자기하다. 봄이면 피는 꽃도 다양하고 가을엔 노란 은행잎이 금빛으로 찬란하다. 물론 은행 열매가 풍기는 냄새는 고약했지만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다. 시장 옆이니만큼 간혹 덜어진 먹거리에 몰려드는 비둘기 떼는 공원의 불청객이 되었다가 볼거리가 되었다가 하곤 했다.

동네시장 장기판, 훈수 필요 없어

언제나 장기를 두는 사람보다 구경꾼이 많은 법이다. 지켜보고 있으면 구경꾼과 장기판 선수들의 진지함이 끝내준다. [중앙포토]

언제나 장기를 두는 사람보다 구경꾼이 많은 법이다. 지켜보고 있으면 구경꾼과 장기판 선수들의 진지함이 끝내준다. [중앙포토]

궁금했다. 지금 벌어지는 타이틀매치! 저 장기판은 어디서 가져오는 걸까? 꽤 튼튼하게 보이는 게 무거울 것이 틀림없다. 알고 보니 근처 가게에서 맡아 두었다가 이용한다고 한다. 해가 길어지면서부터 공원타이틀매치는 가로등 불이 켜지고도 한참이나 지속됐다. 산들산들 바람이 부드럽게 불고 가로등 불빛은 조용히 빛나는 저녁이다. 여기저기서 딱! 딱! 딱! 장기를 두는 소리가 울린다. 오로지 장기판에 장기 알을 내려놓는 소리만으로도 그 열기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장기를 두는 사람보다 구경꾼이 많은 법이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근처 산에 다녀온 듯한 등산복 어르신, 피곤하지도 않은지 귀가도 미루고 구경에 열중이다. 저기 핑크빛 셔츠에 하얀 바지를 차려입은 멋쟁이 어르신은 훈수가 두고 싶은 모양이다. 계속 “아~”, “참 ~~”을 꺼냈다가 도로 삼키곤 한다. 아무튼, 구경꾼과 장기판의 선수들까지 그 진지함이 끝내준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눈치 없이 훈수를 두거나 장기 두는 사람 어디 갔냐며 허풍을 떨곤 하던데 요즘은 그렇지도 않은가보다. 한참을 조용하게 긴장감마저 흐르며 진행되던 동네 타이틀매치였다. 그러다 갑자기 와락 큰소리가 났다. 하릴없이 멀찌감치 바라보던 나도 깜짝 놀랐다. 누군가 훈수를 둔 모양이었다. 승부에 영향을 끼칠 만큼이었을까? 자칫 큰 싸움이 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이내 조용해진다.

“아, 요새 누가 훈수를 둬!”

한 어르신의 일갈에 동네 타이틀매치는 다시 조용한 싸움으로 들어갔다.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어르신들은 식사도 미룬 채 장기 삼매경, 구경 삼매경이다. 장기판이 벌어지는 옆에선 시장 떨이에 성공(?)하신 할머니의 자랑이 늘어지고 있다. 금파였던 대파를 세상에나 한 단에 천 원에 샀다며 목소리가 날아가는 것 같다. 요즘 마트에서도 그 가격인데…. 호호호.

동네시장 옆 작은 공원의 밤은 늘 이렇게 소소한 이야기와 열띤 승부로 저물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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