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너무 미화됐다" 망국책임론도 나온 '지킬 앤 하이드'

중앙일보

입력 2021.07.04 19:00

업데이트 2021.07.04 19:22

영화 '역린', '사도', 드라마 '이산' 등 여러 문화콘텐트에서 다양하게 다뤄진 정조.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영화 '역린', '사도', 드라마 '이산' 등 여러 문화콘텐트에서 다양하게 다뤄진 정조.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조선 22대 국왕 정조는 1800년 6월 28일(음력) 사망했다. 무더위와 고열로 혼미한 상태에서 제대로 유언조차 남기지 못했다.

[다시보는 개혁군주 정조③끝]
시민계급 탄생과 연결은 무리
김조순 지명하며 세도정치 서막
개방보다는 강력한 주자주의자
'좌척우현' 강조하며 내로남불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후하다. 애민(愛民)군주, 개방과 개혁을 추진한 지도자, 근대의 문을 열고자 했던 왕 등으로 평가받으며 지금까지도 정치인의 표상처럼 수용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정조가 48세라는 이른 나이로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남인과 함께 개혁정치를 이끌고 나갔다면 조선은 근대적 군주국가로 발돋움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적지 않다. 또 그가 생전에 말한 '민국(民國)'은 근대 시민 계급의 출현을 예고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대중이 정조에게 갖는 기대나 이미지가 소설 등 대중문화의 영향으로 지나치게 미화되어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에 더해 최근에는 조선이 망국의 길로 들어선 것에 대한 '책임론'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박현모 여주대 교수는 “조선의 망국을 정조에게 책임이 있다고 보는 것은 다소 무리한 이야기지만, 정조에 대해 지나치게 포장된 이미지가 마치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도 있는 법. 정조의 시대가 모두 밝은 면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정조 스스로 '지킬 앤 하이드'의 지킬과 하이드처럼 선악이 공존하는 면모도 있었다. 또 세상의 어둠을 제거하고자 스스로 어둠의 방식을 사용했던 배트맨처럼 정조 또한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지향하면서도 군자라면 꺼려야 할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2009년 공개된 정조와 노론 벽파의 지도자 심환지가 나눈 비밀편지가 대표적 사례다.

그렇다면 학계에서 보는 정조의 부정적 유산 혹은 미화된 측면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 학자들이 보는 정조의 '타산지석' 리스트다.

2009년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과 고전번역원 번역대학원이 새로 발견된 정조의 어찰 299편중 일부를 공개하는 모습. 왼쪽부터 당시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 ,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 진재교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가 편지들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김도훈 인턴기자]

2009년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과 고전번역원 번역대학원이 새로 발견된 정조의 어찰 299편중 일부를 공개하는 모습. 왼쪽부터 당시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 ,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 진재교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가 편지들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김도훈 인턴기자]

①시민 계급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18세기는 절대군주의 시대였다. 루이 14세, 프리드리히 대왕, 건륭제 등이 나왔고, 조선도 숙종-영조-정조가 이전보다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 정조는 군신공치(군주와 신하가 함께 다스림)의 원칙을 깨고 초월적 지위에 서고자 했다. 최성환 서울대 규장각 연구원은 "정조를 사민(士民) 평등과 토지 균분을 지향하며 대동세계를 건설하려던 군주로 해석하는데, 이는 실제 모습과 다르다"며 "정조가 지향한 것은 평등과 균분의 대동세계가 아니라 18세기라는 시대의 현실적인 개혁"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정조는 빈부와 양천(良賤) 등을 철폐하고 토지를 고르게 분배해 나눠주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정전제는 종이에 쓰인 학설에 불과하며, 과거제는 불가피하다'고 답변했다. 물론 공노비 혁파나 서얼 허통 등 신분제를 완화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구상은 없었다.

보물 932호 영조 어진 [사진 문화재청]

보물 932호 영조 어진 [사진 문화재청]

정조가 11세 때 영조는 “나라를 세운 것은 임금을 위한 것이냐, 백성을 위한 것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이때 정조는 “임금을 위한 것”이라고 답했다가 영조로부터 “백성들을 위해 나라를 세운 것”이라고 반박당했다. 하지만 정조의 철학은 바뀌지 않았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이루어진 일을 가지고 백성들과 더불어 즐길 수는 있으나 일의 시작을 함께 도모할 수는 없다”(『정조실록』22년 4월 27일)고 했다. 박현모 교수는 “정조는 백성을 정책의 수혜자로 보는 관점을 확실히 밝혔다”고 평가했다.

②세도정치의 빌미 제공 

정조는 사망하기 한 달 전 오회연교를 열고 세자(순조)에 대한 양위를 비롯해 자신은 화성에서 사실상 상왕으로 머물고자 하는 구상을 밝힌 뒤 자신의 초월적 통치권에 대한 충성 맹세를 요구했다. 하지만 이날 모인 대신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이들은 군신공치(君臣共治·임금과 신하가 함께 다스린다)라는 유학적 통치원칙을 고수하고자 했다. 심지어 정조가 정치적으로 지원한 소론이나 노론 시파에서도 냉담하자 크게 실망한 정조는 사돈(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에게 세도를 맡겼다.

이는 자신이 재위 초부터 천명해온 '우현좌척(인재를 가까이하고 외척을 멀리한다)'이라는 독트린을 뒤집은 것이다. 결국 순조 시대에 김조순 세력은 권력을 장악했다. 이런 이유로 19세기 조선 정치를 후퇴시킨 세도정치의 일정 책임은 정조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김조순 초상화 [사진 위키백과]

김조순 초상화 [사진 위키백과]

여기에는 정조의 자신감을 넘어서 자만감이 된 특유의 성격도 작용했다. 정조는 집권 후반기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호를 사용하며 천하의 스승을 자처했다.

“만천명월주인옹은 말하노라… (나는) 물과 달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태극과 음양오행의 이치를 깨달았다. 달은 하나며 물은 수만이지만 물로써 달을 담으니 앞에 흘러가는 물에도 달이요, 뒤에 흘러오는 물에도 달이다. 달의 수와 냇물의 수가 같으니 냇물의 수가 만 개라면 달의 수도 만 개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하늘에 있는 달이 본디 하나이기 때문이다. 물이 세상 사람들이라면 달이 비춰 그 상태를 나타내는 것은 사람들 각자의 얼굴이고 달은 태극인데, 그 태극은 바로 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 (『홍재전서』)

유봉학 한신대 명예교수는 "어찌 보면 오만하기까지 한 이런 관념 속에서 말년에는 충성 맹세를 받으려다 실패했다. 그간 쌓은 정치적 질서가 무너지는 화를 자초했다”고 지적했다.

③개방적 군주? 주자성리학 신봉자!

정조는 서양의 문물에 관심이 많았으며, 성리학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다고 알려져 있다. 수원성 건설에 거중기를 이용한 것이나 서학에 대한 관용 등을 그런 예로 든다. 하지만 정조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정조가 주자와 송시열의 학문만을 정학(正學)으로 존숭했으며, 도리어 성리학적 세계를 공고히 하려고 노력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비롯된 대표적 사건이 '문체반정(文體反正)'이다. 박지원, 김조순 등 노론 시파 인사들이 청나라에서 유행한 소설류의 이른바 소품체에 빠져들자 정조는 이를 '타락'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주자를 따르도록 권면했다.

연암 박지원 친필 열하일기. 망양록 부분이다. 아들 박종채(탁현재)가 갈무리한 내용을 표지에 붙여둔 걸로 연암의 친필임을 알 수 있다. 단국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연암 박지원 친필 열하일기. 망양록 부분이다. 아들 박종채(탁현재)가 갈무리한 내용을 표지에 붙여둔 걸로 연암의 친필임을 알 수 있다. 단국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지금 이 시대에 맞는 선비가 되려면 제일 좋은 길이 바로 주자의 시를 배우는 것이다…. 뒤틀리고 괴벽하고 태만한 생각은 일지 않아 가까이는 부모를 섬길 수 있고, 멀리는 임금을 섬길 수 있다.” “서양의 학문은 학문 중의 잘못된 것이요, 소품의 문장은 문장 중에서 잘못된 것이다… 오늘날 문장을 공부하는 사람은 소품 두려워하기를 사학(邪學) 두려워하는 것처럼 한 연후라야 오랑캐나 짐승이 되어가는 것을 면할 수 있다.” (『홍재전서』)

정조는 한양에서 유행하는 방각본(소설) 판본을 압수해 불태우게 했고, 글쓰기도 한(漢)나라 시대의 고문체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신하들에겐 반성문을 받았고, 과거시험에서도 이를 지키지 않으면 급제 자격을 박탈하는 초강수를 뒀다.

그렇다면 이렇게 성리학 절대주의자가 서학을 용인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최성환 서울대 규장각 연구원은 이를 '부정학(浮正學)'이라고 본다. 즉, '바른 학문'인 성리학을 부양하면 사파에 불과한 서학 등은 스스로 가라앉을 것으로 봤다는 것이다. 성리학에 대한 우수성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한편 문체반정을 정치적 포석으로써 보는 견해도 있다. 박현모 여주대 교수는 "정조가 중용한 남인이 서학 수용 문제로 비판받았기 때문에 노론의 문체를 문제 삼아 양쪽의 균형을 맞추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즉 남인과 노론의 정치적 균형을 위해 서학과 문체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2017년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조명하는 특별전의 전시물들.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십자가(왼쪽부터), 안중근의 유묵, 회화 성모자상(장우성 作). 2017.8.8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연합뉴스]

2017년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조명하는 특별전의 전시물들.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십자가(왼쪽부터), 안중근의 유묵, 회화 성모자상(장우성 作). 2017.8.8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연합뉴스]

④내로남불

정조는 신하들에게 사를 버리고 공을 좇으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이를 실천하지 못하고 불법적이고 자의적인 경우가 종종 나타났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은언군 문제다.
그는 1794년 이복동생인 은언군을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불러 창덕궁 북쪽에 머물게 했고, 만나기도 했다. 신하들이 비판하자 그는 "이런 모습을 익숙하게 해 장차 아무도 거론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엄포를 놓고나 이에 대한 상소를 일절 내지 못하게 금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처럼 정조는 직언하는 신하가 없다고 한탄하면서도 자신이 민감하게 여기는 문제에 대해 상소하면 '금령'으로 막아버렸다.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십연구소 박현모 소장.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십연구소 박현모 소장.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정조평전』을 쓴 박현모 교수는 이를 '이중몰입(competing commitment)'이라고 분석한다. 현재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미래 목표에 맞게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정신 모형 2를 선언하거나 지향하지만(몰입 1), 익숙한 현재 삶의 방식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정신 모형 1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몰입 2)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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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교수는 "이런 정조의 정치는 언론 전반을 무기력하게 만들었으며, 재위 후반에는 대다수 관료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건설적인 비판이나 제안이 나오지 않았다"며 "세도정치기에는 약화된 언관들이 외척 세도가들의 권력 남용을 견제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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