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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의 ‘여성’과 손원평의 ‘집’, 그리고 정유정의 ‘행복’ [뉴스원샷]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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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문화팀장의 픽 - 흥행작가 신작 속 한국 사회

조남주ㆍ손원평ㆍ정유정 등 한국 문학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 여성작가 세 명이 잇따라 신작을 내놨습니다.

『82년생 김지영』 신드롬을 일으킨 조남주의 소설집 『우리가 쓴 것』(민음사), 청소년 소설 『아몬드』로 성인 독자들까지 매료시킨 손원평의 소설집 『타인의 집』(창비), 명실상부 스릴러의 대가 정유정의 장편 『완전한 행복』(은행나무)입니다.

이들은 이번에도 자신에게 익숙한 기술로 독자들을 공략합니다. 조남주는 평범한 여성들이 겪었음 직한 삶의 경험을 얘깃거리로 풀어내고, 손원평은 섬세한 심리 묘사에 힘을 쏟습니다. 정유정이야 뭐, 말할 것도 없지요. 끔찍한 살인 사건의 촘촘한 플롯에 인간의 본성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시선. ‘믿고 보는 정유정’ 명성 그대로입니다.

이들은 각각 ‘여성’과 ‘집’, 그리고 ‘행복’을 키워드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면서 ‘젠더 갈등’과 ‘부동산 계급’ ‘행복 강박’ 등 한국 사회의 단면을 꼬집어냅니다. 이야기꾼들이 풀어낸 우리 사회의 모습을 살짝 소개합니다. 주말, 어느 책을 손에 들어도 쉽게 빠져들 법한 소설 속 장면입니다.

조남주 소설집 『우리가 쓴 것』. [사진 민음사]

조남주 소설집 『우리가 쓴 것』. [사진 민음사]

◇미스 김은 미스 김이니까…조남주 『우리가 쓴 것』

미스 김은 그러니까, 미스 김이다. 직함도 없고 부서도 없고 딱히 전담하는 업무도, 클라이언트도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미스 김은 대체 하는 일이 뭐가 싶은데 실은 회사에서 가장 바빴다. 정해진 일이 없는 대신 모든 일을 했다. 보도 자료도 썼고, 릴리스도 했고, 기자 미팅도 했고, 촬영 서포트도 했고, 홈페이지 관리도 했고, 병원이나 학회로 영업도 다녔다. (129쪽)

“미스 김 자리가 애매하네. 불편하기도 하고.”

사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회사도 분위기 쇄신이 필요한 시점이야.”

미스 김의 영향력이 너무 커져 있었다. 대리도 아니고 과장도 아니고 실장도 아니고, 경력은 길지만 직급은 제일 낮고. 연봉도 제일 낮은 미스 김이 회사의 모든 업무를 파악하고 조욜하고 진행했다. 그렇다고 미스 김을 승진시키거나 연봉을 올려 줄 수는 없었다. 미스 김은 미스 김이니까. (132쪽)

손원평 소설집 『타인의 집』. [사진 창비]

손원평 소설집 『타인의 집』. [사진 창비]

◇줄 끝에 매달린 인형처럼…손원평 『타인의 집』

따지고 보면 남자친구와 파혼한 이유도 집 때문이었다. 그가 지방으로 발령 나면서 롱디 커플이 된 우리는 이년간 누구보다 애틋한 연애를 지속했다. 갈등은 장거리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할 곳이 없어서 생겼다. 하늘 아래 어느 집도 우리의 예산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고 번뇌에 휩싸여 입술을 쥐어뜯는 동안 매주 치솟는 집값에 우린 꿈꿨던 곳에서 한 구역씩 밀려나고 있었다. 더이상 밀려나는 게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남자친구는 자신의 부모님과 함께 살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말했다. 잠깐이야, 처음 몇 년만. (149쪽)

나는 서둘러 내 방으로 돌아왔다. 줄 끝에 매달린 인형처럼 인생은 의지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계약서에 명시된 쾌조씨의 전세기간은 넉 달 후에 종료였다. 장기 전세가 가능하다는 말만 철썩 믿고 들어왔지만 상황이 바뀔 가능성은 충분했다. 이제 새로운 집주인이라는 이름으로 그 줄을 쥔 자가 내 운명을 결정할 차례였다. 계속 여기 살 수 있을까. 때로 벗어나고 싶은 순간이 있긴 했어도 쫓겨나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문득 어깨가 무거워지는 게 이 방에서 살던 사람의 발이 내 어깨 위에 얹혀 있는 것 같았다. (169∼170쪽)

정유정 장편소설 『완전한 행복』. [사진 은행나무]

정유정 장편소설 『완전한 행복』. [사진 은행나무]

◇완전해질 때까지 ‘뺄셈’…정유정 『완전한 행복』

자신이 원하는 걸 상대도 원해야만 결혼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물었다.
“그게 뭔데?”

너무나 당연해서 어처구니가 없는 답변이 나왔다.
“행복하게 사는 거.”

행복을 원치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는 자신도 같은 것을 원한다고 말했다. 행복하려고 결혼하자는 거라 덧붙였다. 그녀는 물었다.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한번 구체적으로 얘기해봐.”

불시에 일격을 당한 기분이었다. 그처럼 근본적인 질문을 해올 줄은 몰랐다. 사실을 말하자면 행복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한 적이 없었다. 고민한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니니까. 그는 머뭇대다 대답했다.
“행복한 순간을 하나씩 더해가면, 그 인생은 결국 행복한 거 아닌가.”

“아니, 행복은 덧셈이 아니야.”

그녀는 베란다 유리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치 먼 지평선을 넘어다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실제로 보이는 건 유리문에 반사된 실내풍경뿐일 텐데.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 (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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