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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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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호 31면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나는 글을 쓸 때 옛사람들 이야기를 많이 인용하는 편이다. 그런데 거기에 거부감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대체로 서양 고사(故事)보다는 동양 고사를 들었을 때 거부감이 더 크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얘기할 때는 가만있다가도 『사기 열전』을 말하면 찡그리는 경우를 본다. 아무래도 익숙함 속에서 고리타분함을 더 느끼는 모양이다.

인간은 결코 진보하지 않아 #시대착오적 상황 곳곳 산재 #우리도 더욱 악화될까 걱정 #유권자가 국가 화복 결정해

또한 고전을 잘 모르는 사람들일수록 거부감을 갖는 것 같다. 『논어』 속 깊은 지혜를 안다면 “21세기에 무슨 공자왈맹자왈이냐”고 타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걸 모르니 그토록 좁고 느린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뭘 배울 게 있냐는 착각이 나온다. 스마트폰을 쓸 줄 모르던 공자보다 자신이 똑똑하다는 오만도 가능하다.

무식해서 용감할 뿐이다. 인간은 결코 진보하지 않는다. 세상이 나아진 건 인간(동시대 사람이지만 나보다 똑똑한)이 발견해 축적한 지식의 총량이 증가했을 뿐이다. 내가 똑똑해서가 아닌 것이다. 인간이 진보하지 않는다는 건 화성에서 드론을 날리는 21세기 대명천지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증명한다.

오늘날 ‘황제’나 ‘차르’라는 시대착오적 단어가 여전히 쓰임새를 잃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중국은 무산계급 혁명의 기치를 걸었던 공산당 출범 100년 만에 새로운 황제의 등장을 목도하고 있다. 숨죽이던 ‘도광양회(韜光養晦)’에서 벗어나 ‘전랑(戰狼)’의 발톱을 숨기지 않는 이 황제는 대내외로 거침이 없다.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스탠다드를 거부하고 지구상 인구의 63%, 44억명을 하나로 묶는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야심을 펼치며 G2 대우를 당당히 미국에 요구한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급기야 “우리를 괴롭히면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릴 것”이라 경고하기에 이른다. 지난 세기 이런 대국굴기(大國崛起)를 경험하지 못했던 14억 중국 인민은 환호작약하지만, 그들의 자존감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자못 크다. (우리도 큰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선데이칼럼 7/3

선데이칼럼 7/3

중국은 2018년 개헌을 통해 ‘국가주석 2기 초과 연임 불가’ 조항을 삭제했다. 3연임은 물론 그 이상도 가능하다는 의미다. 당대 최고권력자가 한 대 건너 차차기 후임자를 육성하는 ‘격대지정(隔代指定)’ 원칙도 깨졌음은 물론이다. 마오쩌둥 1인 독재의 폐해를 뼈저리게 느꼈던 덩샤오핑이 만든 (민주적이지는 않지만) 효율적이고 예측 가능한 집단지도체제가 무너진 것이다.

시진핑 체제의 결말을 예측하는 건 섣불러도 그 과정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중국에 비판적인 기사를 써오던 홍콩 빈과일보가 사실상 강제폐간 당하고, 사주와 신문사 간부들이 잡혀들어가는 모습이 그것을 웅변한다. 폐간 날 한 간부가 외쳤다. “여기에 언론 자유도, 미래도 없다.” 인간이 진보한다면 결코 들을 수 없었던 절규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얼마 전 2036년까지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법안에 서명했다. 29년간 권좌에 있었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통치 기간을 넘어설 수 있는 시간이다. 개정안에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면책권을 강화하는 조항도 있다. (우리도 많이 본 데자뷔다.)

미얀마에서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저항하는 시민들을 향해 실탄까지 발포했다. 시민들은 소수민족 반군 캠프에까지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고 저항군을 결성하는 등 내전으로 치닫고 있다. 그런데도 국제사회는 실효성 있는 개입도 못 하고 힘없는 비판만 이어가는 형편이다.

이 모두가 민주주의란 용어가 귀에 못 박혀 진부하게 여겨질 정도인 오늘날 벌어지는 일들이다. 인간이 진보한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다.

하긴 멀리 볼 것도 없다. 민주주의공화국의 이름으로 권력의 3대 세습이 버젓이 행해지는 왕조 아닌 왕조국가가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백성들은 굶어도 정권 안보를 위해 핵미사일 개발에만 올인하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건 인간이 진보한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나라에 퍼주질 못해 안달하는 대한민국 정부, 고모부와 이복형을 잔인하게 살해한 김정은을 “정직하고 열정적이며 의지가 강하다”고 평가하는 대통령은 어이가 없어서 더 말하기도 싫다. 다만 앞서 든 국가들의 일이 이 땅에서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까닭에 하는 말이다. 오히려 그럴 조짐이 작지 않아 두려워서 하는 소리다.

이미 대통령의 30년 지기의 낙선 설움을 달래주려고 선거 개입까지 한 청와대다. 검찰이 그걸 수사하자 검찰 수사권을 빼앗고 수사팀을 해체해버리는 정부다. 정치적 중립을 위해 임기가 보장된 검찰총장을 쫓아내려고 온갖 짓을 다 하더니, 감사원장의 사퇴를 두고는 임기와 정치적 중립을 운운하며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여당이다. 그런 짓들을 다 적폐청산, 검찰개혁의 이름으로 행하는 정권이다. 자기들로 주류를 교체해 20년은 권력을 쥐어야 한다고 공공연히 말하던 세력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진보하지 않는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이런 이들이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갈지 두렵다. 유권자들이 정신 번쩍 차리고, 두 눈 부릅떠야 할 이유다. (정권이 바뀌어도 그래야 한다) 국가의 화복(禍福)은 유권자에 달렸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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