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프리즘] 서울문고, 부도가 약이 되려면

중앙선데이

입력 2021.07.03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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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호 31면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어떤 일은 사후에 더 또렷이 보인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가령 지난해 6월 세상을 뜬 출판인 박종만이 그렇다. 생전 그는 출판사 까치의 책들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존재였다. 디자인이 세련되진 않지만 교양인을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피해가기 어려웠을 법한 책들 말이다. 『과학혁명의 구조』 『극단의 시대: 20세기의 역사』 같은 책들이 그의 손을 거쳐 국내에 소개됐다. 1주기를 맞아 최근 비매품으로 출간된 추모집 『출판인 박종만』을 받아보니 까치 책들에 가려졌던 그의 내면이 보인다. 추모집에는 생전 그의 글들이 주로 실려 있다. ‘5년 걸린 번역’이라는 글에서 그는 “가슴 저 밑바닥에서 무엇인가가 울컥 솟아올랐고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썼다. 지난한 번역 과정을 거친 펑유란(馮友蘭)의 『중국철학사』 출간 소감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우리 출판계에서 이런 열정과 끈기를 갈수록 보기 어렵다고 하면 성급한 판단일까.

후진적 유통 관행 더 큰 피해 불러
“출판은 구멍가게” 쓴소리 새겨야

출판인들은 정신 똑바로 차린다 하더라도 출판 제도와 환경이 좋은 책을 내는 데 그리 우호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제2의 박종만’이 나오기 어려운 구조다. 책 만드는 일 말고 다른 일로 바쁘기 때문이다. 지난달 중순 서울문고(반디앤루니스) 부도 사태 말이다. 업계 3위 규모라는 대형 오프라인 서점의 부도 사건을 어떻게 봐야 할까. 구태의연하게 종이책 종말론을 갖다 대야 할까. 아니면 역시 독자의 발길을 가로막는 코로나를 탓해야 할까.

원인이 무엇이든 박종만의 후배 세대 출판인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바쁘다. 책 한 권이라도 더 회수해 서울문고 부도로 인한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출판인들은 부도 직후인 지난달 17일 서울문고의 파주 물류센터로 몰려갔다. 문고 측이 책을 내주겠다고 해서다. 하지만 거부당했다. 정작 물류회사인 북플러스가 문고에서 못 받은 돈이 있다며 책 반출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한 출판인은 “어두운 창고와 밤하늘만 보고 왔네요”라는 글을 18일 새벽 페이스북에 올렸다. 같은 달 23~25일 출판인들은 새벽별 보기 운동 같은 걸 해야 했다. 서울문고 신세계강남점이 백화점 운영시간을 피해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 사이에, 그것도 혼잡을 피하기 위해 출판사 이름 가나다순으로 책을 회수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한 출판인은 “목요일 밤 11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로 회수 시간이 정해져 알바를 썼다”고 했다.

정작 기막힌 건 부도의 내용이다. 출판문화협회는 피해 규모를 3000개 출판사, 180억 원가량으로 추산한다. 그런데 문고의 물류 창고에는 66억 원어치의 책이 남아 있는 반면 출판사들 장부에 기록돼 있는 공급 물량은 130억원가량이나 된다고 한다. 출판사들은 책이 더 가 있다고 하고, 문고는 이것밖에 없다고 하는 형국이다. 차액이 60억원이나 된다. 어음, 위탁 같은 일반인들은 듣기만 해도 골치 아픈 후진적 유통 관행들이 이리저리 뒤얽힌 결과다.

이런 문제를 바로잡는 방법은 뭘까. 단칼에 손쉬운 해결책이 있을 리 없다. 결국 출판인들 스스로 제도와 환경 정비에 나서야 한다.

그래서 출판인 박종만의 글과 생각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그는 1992년 ‘한국출판문화상의 의미’라는 글에서 한국 출판산업은 “아직도 문화를 빙자하여 정부의 지원을 기대하는 구멍가게에 불과”하다고 질타했다. 94년 ‘책에 재투자 않는 출판업계’라는 글에서는 “망(亡)출판의 적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책 만들기’ 자체에 재투자하지 않는 출판업자 자신”이라고 했다. 이런 쓴소리가 시대착오적이기만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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