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는 다자 협력 견인 밑바탕…정치 지도자 전략적 결단·타협 필요

중앙선데이

입력 2021.07.03 00:24

업데이트 2021.07.03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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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호 09면

[SPECIAL REPORT]
최악의 한·일 관계 돌파구는?

2019년 12월 24일 중국 청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한·일 정상회담은 이날 이후 중단된 상태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9년 12월 24일 중국 청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한·일 정상회담은 이날 이후 중단된 상태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최근 한·일 관계는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악화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특히 2018년 이후엔 과거사뿐 아니라 외교·안보·경제·환경 등의 영역에서도 사사건건 마찰이 빚어지고 대립이 심화하고 있다. 관계 악화는 정부 차원을 넘어 국민감정 수준으로 확대돼 반일 대 혐한 구도가 점차 굳어지고 있다. 식민지 역사에서 비롯된 피해자·가해자 관계가 이젠 공수가 역전돼 일본이 공세적 태도를 취하고 한국이 수세적 자세에 서는 웃픈 모습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더욱이 한·일 문제가 ‘죽창가’에서 보듯 외교 쟁점을 넘어 진영 논리의 도구로 악용되거나 정쟁의 수단으로 등장하는 일도 낯설지 않다.

양국 관계 정상화 해법
편견 탓 서로 상대국 ‘악마화’
한·일, 이익 공유하는 운명 공동체
소통·대화 통해 신뢰 회복해야

한·일 관계 악화는 동북아 국제 질서의 전환이란 맥락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90년부터 30여 년에 걸친 한·중·일 3국의 역학 관계는 상전벽해라 할 만큼 극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당시 한·중·일 국력은 1대 1대 10에 가까웠다면 2020년 일본은 한국의 3배, 중국은 한국의 10배 정도로 엄청난 간극이 생겼다. 한마디로 30년 만에 중국은 아시아 최강자로 급부상했고, 일본은 국력의 상대적 저하를 겪었으며, 한국은 미들 파워 국가로 떠오르는 격심한 세력균형의 유동화 현상이 벌어졌다.

국제정치학자들은 대국 간 전쟁 혹은 갈등의 원인을 종종 세력 전이(Power Transition)에서 찾는다. 동북아 3국 간에 벌어진 역학 관계의 역동적 변환 과정이야말로 역내 국가 갈등의 배경을 제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일 관계에 한정해서 볼 경우 양국의 국력 차는 극적으로 좁혀지고 있다. 1965년 수교 당시 일본은 한국의 30배가 넘는 국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엔 10배, 2010년엔 5배로 변했고 마침내 2020년엔 3배로 간격이 줄어들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경우 이제 거의 차이가 없어졌고 취업자 기준 1인당 소득만 보면 한국이 4만2300달러, 일본이 3만8600달러로 오히려 역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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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한·일 관계는 강대국 대 약소국의 수직적 관계에서 바야흐로 수평적이고 대등한 양자 관계로 변모하고 있다. 군사비 지출만 놓고 보면 양국 격차가 별로 존재하지 않으며 경제와 산업, 첨단기술 분야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관계가 됐다. 종합적 국력 차원에서 한국은 일본을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고 이 차이는 더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양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이런 급격한 힘의 관계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즉 세력균형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구시대의 관성과 타성에 머물러 있는 게 작금의 한·일 외교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한·일 양국의 국가 정체성에서도 다소의 충돌이 발생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은 정치사회 분야에서 급격한 민주화를 경험했고 인권 의식도 고양됐다. 시민사회의 성장에 따라 시민들의 정치적 요구도 강렬하게 표출됐고 국가 폭력에 의한 희생자 그룹의 목소리도 한결 높아졌다. 반면 일본은 정치사회의 보수화와 국가주의적 경향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경제의 잃어버린 30년을 겪고 동일본 대지진, 원전 사고 등 미증유의 재난을 경험하면서 사회심리적 불안도 커졌다.

또한 1990년대까지만 해도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등 시대를 풍미했던 관용적인 국제 인식과 역사 반성에 기반한 근린 외교는 2010년대 이후 실종을 고하고 역사수정주의가 대두했다. 이런 배경하에서 한국에서는 위안부·징용 문제가 재부상하고 대일 배상 요구도 강렬해진 반면 일본에서는 거듭된 배상 요구에 대한 ‘사죄 피로’ 현상과 더불어 ‘골대 변경론’이 등장하면서 혐한·반한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다. 이런 양국의 사회 변화가 역사 마찰이 첨예화하는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관계 악화의 직접적인 원인은 양국의 매스 미디어를 매개로 오해와 편견, 그리고 무지가 극대화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양국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단순히 상대를 ‘악마화’하고 있다. 한국은 아베·스가 정부가 역사를 미화하고 정치·군사적으로 우경화의 길을 걷는 위협 세력이라고 간주하고 있고, 일본은 문재인 정부가 의도적으로 친북·반일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 가운데 양국 지도부 사이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고 전략적인 의사소통도 두절됐다. 한·일 간의 제대로 된 정상회담은 2011년 이명박·노다 회담 이래 사실상 10년간 열리지 못하고 있다. 관계 악화가 정상회담의 부재를 초래한 면도 있지만 역으로 정상회담의 부재가 관계 악화를 부채질하는 측면도 부정할 수 없다. 정상회담이 일상화돼 있는 오늘의 국제사회에서 한·일 정상은 만남조차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그러나 최악의 한·일 관계를 방치해 둘 수만은 없는 게 우리가 당면한 냉엄한 현실이다. 한·일 관계는 한·미·일 안보 협력 체제의 일각으로 한·미동맹의 연장에서 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일 관계는 한·미동맹의 숨겨진 코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외교에서 도쿄 축은 워싱턴과 베이징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다. 한반도 평화 추진에 일본의 건설적 역할을 견인하는 것은 대일 외교의 중요한 몫이라 할 수 있다. 한·일 관계는 역대 다자 협력을 견인하는 바탕이자 외교적 자원이기도 하다.

점차 격화하는 미·중 전략 경쟁의 구도 속에서 한·일 양국은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운명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또 시장 민주주의라는 기본 가치와 규범을 공유한 아시아의 핵심 국가이며 동시에 고령화·저출산 인구 문제와 재정 절벽 등 공통의 사회경제적 과제를 공유하고 있는 관계다. 따라서 역사 갈등에 매몰돼 서로를 떠미는 한·일 관계는 전략적 관점에서 볼 때 결코 유익하다고 할 수 없다.

한·일 관계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최고 지도자의 소통과 대화를 재개해 신뢰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징용·위안부 문제와 수출 규제, 대북 정책 공조, 안보 협력 등의 난제는 지도자의 전략적 결단과 대타협으로 얼마든지 풀어갈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전략적 사고와 그에 기반한 외교적 결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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