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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과 대화해봤자 득 될 게 없다”…스가, 차기 정권 출범 때까지 기다릴 속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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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호 10면

[SPECIAL REPORT]
최악의 한·일 관계 돌파구는?

“가장 경계한 건 한국(문 대통령)이었다.”

문재인 정권 불신 강한 일본 #코로나·올림픽·선거 등 난제 첩첩 #한·일 관계 건드렸다 역풍 우려도 #일본인 80% “문 대통령 신뢰 안 해”

지난 11~13일 영국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끝난 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는 주변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회담을 하게 되는 상황이 올까봐 피해 다녔다는 ‘고백’과 다름없다. 총리 측근을 인용해 이 말을 전한 아사히 신문은 G7 회담장에서 문 대통령이 먼저 말을 걸어왔지만 스가 총리가 “실무 쪽에서 조율하지 않으면 (회담은) 어렵다”며 깊은 대화를 피했다고 보도했다. 인사와 함께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약식 회담에 양쪽이 ‘잠정 합의’했지만 “전적으로 스가 총리의 판단”(외무성 간부)으로 회담이 불발됐다는 것이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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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7 정상회의에서 드러난 스가 총리의 이 같은 행동은 현재 한국을 대하는 일본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마디로 말하면 “대화해서 (우리에게) 좋을 게 없으니 말도 걸지 말아 달라”로 요약된다. 스가 총리는 일본이 한국 정부에 강제징용·위안부 문제 등의 해결책을 제시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빈손’으로 온 문 대통령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경우 일본 내 비판 여론이 높아질 것을 우려했다고 아사히 신문은 분석했다. 코로나19 대응 실패와 올림픽 강행 등으로 그러잖아도 점수가 깎일 대로 깎인 스가 정부가 “이 시점에 한국과 ‘얽히는’ 게 정치적으로 실이 되면 됐지 득이 될 게 없다”며 내부 계산을 끝냈다는 얘기다.

일본이 처음부터 대화를 거부한 건 아니었다. 강제징용 판결로 갈등이 심화되자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중재위원회를 구성해 문제를 논의하자고 한국 정부에 수차례 요청했다. 한국은 ‘무응답’으로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일본은 ‘수출 규제’라는 경제 보복으로 응수한 뒤 한국을 “국가 간의 약속을 제멋대로 깨버리는 신뢰할 수 없는 나라”로 규정하며 여론전에 들어갔다.

올 초엔 미국에서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한·일 관계 개선의 물꼬가 트이리란 전망도 제기됐다. 먼저 손을 내민 건 한국이었다. 문 대통령은 연초 기자회견 등에서 “일본 기업 자산의 현금화는 바람직하지 않다” “2015년 위안부 합의는 양국 정부의 공식 합의였다” 등의 메시지를 발신하며 일본과 외교적 대화에 나설 뜻을 밝혔다. 하지만 일본의 반응은 싸늘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에도 “진의를 파악 중”이란 입장만 내놨다. 발언 뒤에 또 다른 ‘진의’가 감춰져 있을 것이란 불신의 표현이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불신은 한국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게 외교 소식통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한국의 입장 전환에 대해서도 총리 관저와 외무성에선 “바이든 정부를 의식한 일시적인 태도 변화 아니겠느냐” “실질적인 대책을 보여주기 전까진 믿을 수 없다. 휘둘리면 안 된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라고 한다. 도쿄의 한 소식통은 “특히 총리 관저에는 한·일 관계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인물이 거의 없다”며 “문재인 정부와는 대화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입각해 차기 정권이 출범할 때까진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스가 총리로서는 여유가 없기도 하다. 이미 지지율이 위험 수위까지 하락한 상황에서 국내 코로나19 확산을 최대한 억제해 도쿄 올림픽을 큰 문제 없이 치러낸 뒤 가을에 열리는 중의원 선거를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 어렵고도 시급한 숙제를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라도 어그러질 경우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잔여 임기만 메우며 ‘땜빵 총리’로 물러나야 할 수도 있다. “괜히 까다로운 한·일 관계를 건드렸다가 역풍이 불 것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외교 소식통)인 셈이다.

일본 내 여론 역시 스가 총리의 선택을 뒷받침한다. 극심한 갈등의 시간을 지내면서 극우 세력뿐 아니라 ‘보통의 일본인’들에게도 한국의 이미지는 급격히 나빠졌다. 지난달 요미우리 신문과 한국일보가 실시한 공동 여론조사에서 일본인의 69%는 “한국을 신뢰할 수 없다”고 답했다. “문 대통령을 신뢰할 수 없다”는 답변은 무려 80%에 달했다.

코로나19로 양국의 민간 교류가 1년 넘게 멈춰선 가운데 ‘한국은 약속을 깨는 나라’라는 일본 정부의 명료한 프레임이 일반인들에게도 먹혀들었다는 분석이다. 최근 일본 언론들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선출과 윤석열 전 검찰총장 대선 출마 등을 메인 뉴스로 보도하며 한국의 정권 교체 가능성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현재 상황에서 일본 정부를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동력은 미국이다. 중국 견제의 핵심축으로 한·미·일 연대를 강조하는 바이든 정부가 어떤 속도와 강도로 한·일 관계 개선을 밀어붙이느냐가 관건이란 분석이다. 오쿠조노 히데키 시즈오카현립대 교수는 “바이든 정부의 대중 전략상 지금과 같은 한·일 관계를 장기간 방치하진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일본 정부에 한·일 관계 개선 의지가 없다고 (미국이) 판단할 경우 이는 한·일 간 문제뿐 아니라 미·일 간 문제가 돼버린다”며 “일본도 이런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는 만큼 끝까지 강경 자세만 고수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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