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잘나가던 마광수, 『즐거운 사라』로 버림받아 우울증 걸려

중앙선데이

입력 2021.07.03 00:02

업데이트 2021.07.03 00:13

지면보기

743호 16면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18〉 정직해 핍박받은 교수

1992년 10월 소설 『즐거운 사라』의 외설시비로 인해 검찰에 소환되는 마광수 교수. [중앙포토]

1992년 10월 소설 『즐거운 사라』의 외설시비로 인해 검찰에 소환되는 마광수 교수. [중앙포토]

나는 지난 몇 주 동안 세상을 떠난 나의 친구들에 대해 썼다. 나는 헉헉대며 그런대로 잘 써 내려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또 한 명의 죽은 친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연세대 국문과 교수였던 마광수다. 깜빡했으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왜 마광수를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가!

윤동주로 박사학위, 32세에 교수돼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큰소리

92년 『즐거운 사라』로 몰락의 길
강의 중 잡혀가 유죄판결, 직위해제

정지용·이상 등 거침없이 비판
꽁했던 동료들, 재임용 탈락 한몫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다. 선각자들은 우리에게 정직하라! 정직하게 살아라, 그래야 사람답게 살 수가 있는 법이다, 라고 강조한다. 마광수는 내가 아는 어떤 사람보다 정직하게 살았다. 바보처럼 정직하게 살았다. 마광수는 나에게 정직함의 표본이 되긴 하지만 또한 정반대 방향으로 사람이 진짜 정직하면 얼마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는지를 실감케 해주는 위대한 샘플이 되어주었다.

그런 마광수를 중앙SUNDAY 연재 담당 기자의 제안으로 청담동 우리 집 응접실에서 가상으로 만나게 되었다. 지금부터는 내가 평소 끔찍이 싫어했던 픽션으로 나간다.

조: 어이! 마 교수 오랜만이네. 세상 떠난 지 얼마나 됐지?

마: 아이구! 벌써 4년이나 됐네요.

조: 무슨 병이 있었나?

마: 우울증 같은 게 있었나 봐요.

조: 그럼 사망원인이 우울증인가?

마: 딱히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속상해서 제풀에 꺾인 거 같아요.

조: 그놈의 우울증은 어디서 온 거야? 그 전엔 멀쩡했잖아!

마: 멀쩡했었죠. 잘나가다가 연세대학 교수직에서 잘리면서 우울증이 도진 것 같아요.

조: 가만 있어 봐. 그런데 마광수같이 거침없이 써 젖히던 사람이 어떻게 해서 대학교수, 그것도 다른 대학도 아닌 기독교 계통인 연세대학의 교수가 된 거야.

마: 아이. 이거 내 입으로 내 자랑하게 생겼네. 그 옛날 내가 연세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수석 입학했잖아요.

조: 어, 그랬나?

그림 그려 미술전시회도 몇 번 열어

같은 해 11월 서울 서초동 검찰청 앞에서 열린 마 교수의 석방을 요구하는 침묵 시위. [중앙포토]

같은 해 11월 서울 서초동 검찰청 앞에서 열린 마 교수의 석방을 요구하는 침묵 시위. [중앙포토]

마: 전액 장학금 타며 대학을 다녔고 학부성적 올 A로 대학을 마쳤죠. 시인 박두진 선생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하고요. 그러다가 박사학위 받으니까 대학에서 교수하라고 하데요. 그때가 서른둘인가 그랬는데.

조: 그때 박사 논문 주제가 뭐였어?

마: 시인 윤동주요.

조: 우리나라 대표 시인이시지. 내 친구 윤형주의 육촌형이시고.

마: 남학생들은 물론 여학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죠. 손톱 길게 기르고 화장 진하게 하고 노랑 빨강으로 머리 염색한 여자애들요. 그때가 내 인생 최고의 정점이었어요. 내가 큰소리쳤거든요.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고 말에요(※1989년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출간). 성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 생각을 좀 과장해서 쓴 게 문제의 『즐거운 사라』(1992년)였어요.

조: 그게 시야, 소설야.

마: 물론 소설이죠.

조: 내가 왜 그런 질문을 했냐 하면 나는 쭉 『가자! 장미여관으로』(1989년)가 소설 제목인 줄 알았는데 그게 온전한 시집이더라구. 그래서 『즐거운 사라 』를 혼동했던 거지.

마: 그래요. 혼동할 수 있어요. 『가자! 장미여관으로』는 시집 제목 같지 않죠.

조: 내가 엊그제 그 시를 읽어봤는데 정말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던데. 대략 4절의 모던 현대시인데 1절의 서두만 봐도 너무 좋아.

『즐거운 사라』 표지

『즐거운 사라』 표지

만나서 이빨만 까기는 싫어/점잖은 척 뜸 들이며 썰풀기는 더욱 싫어/러브 이즈 터치/러브 이즈 휠링/가자, 장미여관으로!

멋져 멋져. 그런데 『가자! 장미여관으로』 표지에 실린 그림은 거기 사인을 보니까 마 교수 당신 그림이던데 그 표지 그림은 지금 어딨나!

마: 그건 진작에 팔렸죠.

조: 그래! 마광수 교수가 미술전시회도 몇 번인가 했었지. 내 기억엔 그림이 담백하고 순수했던 것 같아. 그때 그러니까 법정에 끌려가게 만든 건 『가자! 장미여관으로』 가 아니라  『즐거운 사라』 였지?

마: 그랬죠. 바로 『즐거운 사라』 가 문제가 됐던 거죠. 사라 책이 나를 처음 몰락의 길로 올려놓았죠. 그리고 꽈다당 몰락.

조: 강의하던 중에 잡혀갔다며?

마: 세계문화사에 유례없는 무례한 일이 벌어졌던 거죠.

조: 마 교수! 이건 내 생각인데 당신의 이혼에서부터 인생이 어긋나기 시작한 거 아닌가?

마: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정신적으로 피곤했던 결혼이라는 고리에서 풀려난 것은 어쩌면 해방 같은 느낌도 들었죠. 결혼의 시작은 꽤 모양이 났었어요. 내가 대학원생일 때 연구동아리에서 만나 사귀게 된 사람이었는데 내가 일방적으로 좋아해서 들이댄 거예요. 그때 그 사람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조: 어우! 그땐 남자처럼 터프했겠네. 그래서 반응은 있던가?

마: 그럼요. 조건이 좋잖아요!

조: 조건이라니 무슨 조건?

마: 내가 서른네 살 연세대에서 인기 있는 대학교수잖아요. 그 사람은 서른세 살.

조: 만난 지 얼마 만에 결혼한 건가?

마: 그럭저럭 10년 만이죠. 그런데 그 사람은 오랫동안 미국에 있어서 한때는 편지 연애를 한 셈이에요.

조: 와우! 베르테르처럼 순박한 플라토닉 연애를 했나 보네.

마: 정말 100% 그랬어요. 원칙 하나가 있었죠.

조: 그게 뭔데.

10년 연애 끝에 결혼, 6개월 후 시들  

2009년 한 잡지에서 대담한 마광수 교수와 조영남씨. [사진 조영남]

2009년 한 잡지에서 대담한 마광수 교수와 조영남씨. [사진 조영남]

마: 이 사람한테만은 결혼 전 육체적으로 들이대지 않는다는 원칙이요. 진짜 제가 사모한 여인이었으니까 말에요.

조: 왠지 우습게 들리는데!

마: 진짜예요. 결혼 후 첫날밤을 치르는데 10년 연애만 하다가…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예요.

조: 결혼생활은 생각한 만큼 그렇게 좋던가?

마: 아뇨. 딱 6개월만 재밌고 나머지는 꽝이었어요.

조: 그렇게 금방 싫어진 거야?

마: 아녜요. 싫다는 의미가 아녜요. 그냥 재미없고 지루하고 따분하고 뭐 그런 거였죠.

조: 싸우거나 다툼 같은 것도 없었나?

마: 그런 건 없었어요. 먼저 별거에 들어가고 별거에 별 불편을 못 느끼면서 쌍방 이혼하자! OK. 좋아 좋아. 이렇게 된 거죠.

조: 이혼에 이어, 수난이 시작된 거군.

마: 따지고 보면 그렇지요. 그다음부터 수감생활, 검찰조사, 법정출두, 난리 도 아니었죠.

조: 그때 마 교수가 한국 법에 걸린 죄명이 뭐였어?

마: 음란물 제작 및 유포죄, 뭐 그런 거요.

조: 그때가 마 교수 몇 살 때인가?

마: 1992년이니까 마흔한 살이었어요. 『즐거운 사라』 가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끌려가 서울구치소에 곧장 수감됐어요.

조: 그래서 어떻게 됐나?

마: 첫 재판 1심에서 유죄판결,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먹었죠. 그다음 해에 연세대학 교수 직위해제, 다시 말해 교수 자리에서 잘린 거죠.

조: 항소 안 했나?

마: 안 하긴요, 했죠.

조: 결과는 어땠나?

마: 항소 2심에서 기각 판결을 받죠.

조: 법원에서 2심 재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였군. 그래서 그다음은.

마: 대법원 상고심에서 역시 상고 기각 판결을 받아요. 원심이 확정된 거죠.

조: 죽어라 죽어라 하는군.

마: 정말 더욱 비참했던 건 재판 결과가 아니라 그때의 유죄 판결 때문에 제가 대학교수 자리에서 시간강사로 강등한 것이에요. 별에서 일등병으로 추락한 거죠. 학교에선 제발 네 발로 나가달라는 협박이나 다름없었죠.

조: 그래서 어떻게 견뎠나.

마: 뭐 그림 대작 사건으로 활동 중단했던 형님처럼 책 쓰고 몇 군데 미술 전시도 했죠. 그러다가 6년 만인 1998년 사면 복권되고 다시 연세대 교수로 복직이 됐어요. 복직된 것까지는 좋았어요. 제가 진짜 큰 상처를 받은 건 그 다다음해, 2000년에 일어나던 이른바 교수 재임용 탈락 소동이에요.

조: 그게 무슨 소리야?

마: 같은 연세대 동료 교수들의 노골적인 따돌림으로 나를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시키려 한 거죠. 제일 친했던 사람들이.

조: 배신감이 컸겠는데.

마: 크다마다요. 평소 잘 알던 사람들이 안면을 싹 깔고 배신을 때리는데 무섭더라고요. 그때 상처가 제일 컸죠. 제가 우울증으로 정신병원을 찾아갔을 정도였으니까요.

조: 오죽했겠어. 친했던 동료들한테 배신당한 거 말야. 그런데 다 지나간 얘기지만 그때 마 교수가 그네들한테 실수한 것도 있는 것 같애.

마: 그게 뭔데요.

조: 당신이 몇 차례 잡지 인터뷰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시인들 가령 정지용 김기림 백석 그리고 내가 특히 좋아했던 ‘오감도’를 쓴 이상(李箱), 이런 시인들의 시조차 쉽게 알아먹기 어렵게 썼다고 지적했던 것. 거기다 당신의 연세대 직계 제자 겸 후배였던 기형도까지 소통이 안돼서 난해하다고 한 것은 너무 나간 거였어. 당신도 미술을 했지만  추상화 전체를 뭘 그린 건지 못 알아먹게 그렸다고 통째로 무시한 거랑 같은 거 아닌가.

마: 그런 지적은 할 수 있잖아요?

조: 나는 당신이 무슨 뜻으로 그런 얘기를 했는지 잘 알아. 그러나 당시의 당신 동료들은 꽁했다가 이때다 하고 들고 일어났던 거야. 우선 늦었지만 그들부터 용서해! 당신은 너무 정직했어. 그 정직이 너무 어린아이 같았던 거야. 너무 길게 얘기한 것 같네. 다시 만나서 얘기하는 거로 남겨 놓자구. 빠른 시일 내에 내가 당신 곁으로 달려갈 테니까.

중앙일보는 2006년 2월 25일자 20면에서 7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 충격을 준 책으로 백기완·송건호 등의 『해방전후사의 인식』,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등과 함께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를 꼽은 바 있다.  〈계속〉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