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책 대신 사람 빌려주는 ‘휴먼북’, 진로 고민 풀어줍니다

중앙일보

입력 2021.07.02 09:00

[더,오래]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89)

어느 날 거래 은행의 40대 차장이 면담을 요청한 적이 있다. 창구에서 거래를 마치고 그가 안내하는 응접실로 가 차 한잔 마시며 덕담을 나누는데 갑자기 말소리를 낮추더니 조기퇴직을 하고 싶다고 한다. 퇴사를 준비하며 내가 쓴 책 『마흔에 시작하는 은퇴공부』도 읽었는데 이젠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싶다는 것이다. 같은 업종에 근무했던 경험이 있어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하기에 왜 그런 생각을 했냐고 물었다.

그는 갈수록 심해지는 경쟁 속에 매일 반복되는 일에 스트레스가 크다고 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은퇴 후에 무얼 할 것인지 물었다. 그는 우선 세계 여행을 하며 심신을 재충전하고 싶다고 했다. 여러 사람이 은퇴 후에 하고 싶은 일로 여행을 꼽았는데 그도 역시 그랬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 물었다. 그는 머뭇거리며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조기 퇴직하고 세계여행을 떠나겠다는 거래처 차장에게 돌아와서의 계획을 묻자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단다. 한참 후 만난 그는 직장생활을 더 하기로 했다는 말을 전해왔다. [사진 unsplash]

조기 퇴직하고 세계여행을 떠나겠다는 거래처 차장에게 돌아와서의 계획을 묻자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단다. 한참 후 만난 그는 직장생활을 더 하기로 했다는 말을 전해왔다. [사진 unsplash]

그에게 맨날 여행만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자칫 일시적인 감정으로 퇴직한 후 일을 다시 하고 싶을지도 모른다며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와 무엇을 할 것인지가 구체화하면 그때 은퇴 설계에 관한 얘기를 다시 하자고 달랬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한참 후 은행을 방문했을 때 그가 겸연쩍게 “선생님, 직장생활을 더 하기로 했습니다”라고 말해 서로 웃었다. 조기퇴직을 꿈꾸더라도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야지 경제적 여유가 있다고 퇴직을 결정했다간 나중에 후회하기 쉽다.

하루는 보험회사에 근무한다는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그가 만나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해 우리는 며칠 후 서로 약속한 날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50대 중반으로 정년을 몇 년 앞둔 간부급 직원이었다. 차를 한 잔 나누며 용건을 물었더니 다음 달에 직장에서 명예퇴직 희망자를 모집하는데 응하는 것이 좋은지 그저 정년 때까지 묵묵히 근무하다 퇴직하는 게 좋은지 고민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재정상태와 퇴직 후 계획에 관해 물어보고 몇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나 역시 진로를 두고 고민한 적이 있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전공을 고민하다가 경제학을 지원했다. 학자가 되겠다는 욕구보다 그저 취업하기 쉽다는 주위의 권유로 택한 것이다. 그의 말대로 취업은 생각처럼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직장생활을 하면서 전공을 잘못 선택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건축가가 되었으면 잘했을 텐데 하는 후회가 드는 것이다. 당시 진로 선택에 대해 누군가 상담을 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

개개인이 가진 재능·지식·지혜 등을 통해 사회적 배려대상자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바꾸어줄 수 있다면 '휴먼북' 클럽의 탄생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사진 unsplash]

개개인이 가진 재능·지식·지혜 등을 통해 사회적 배려대상자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바꾸어줄 수 있다면 '휴먼북' 클럽의 탄생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사진 unsplash]

우리는 이렇게 인생의 길에서 두 가지의 선택을 놓고 고민할 때가 있다. 한길을 택하면 다시는 나머지 길을 갈 수 없기에 신중한 판단이 요구되는데 어느 길을 선택했을 때의 경험이 없어 그 길을 먼저 갔던 사람의 조언을 듣고 싶다. 하지만 그 사람을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사회 각 분야에서 오랫동안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그런 커뮤니티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났다.

알아보니 이미 그런 곳이 있었다. 2000년 덴마크 출신의 사회운동가 로니 에버겔이 덴마크 뮤직 페스티벌에서 창안한 ‘휴먼 라이브러리’다. 책 대신 특정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사람(휴먼북)을 빌려주는 신개념 서비스로 독자는 준비된 휴먼북 목록 중에서 읽고 싶은 사람을 골라 대출하고, 정해진 시간에 만나 자유로이 대화하며 정보를 전달받는다.

독자는 휴먼북과 마주 앉아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의 경험을 얻기 때문에 종이책에서 느낄 수 없는 저자의 생생한 이야기와 경험, 생각을 직접 들을 수 있다. 궁금한 점을 바로 물어볼 수 있다는 것도 휴먼 라이브러리의 장점이다. 한국에는 2010년 국회도서관에서 로니 에버겔을 초청해 ‘휴먼 라이브러리’ 행사를 개최하면서 알려졌다.

얼마 전 지인 몇 사람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공감하는 사람과 함께 ‘휴먼북’ 클럽 발기인 모임을 결성했다. 회원 중에는 공기업 대표를 역임한 사람도 있고 국내 대기업의 해외주재원으로 20여 년 이상 외국에서 근무한 경력자도 있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나눌 경험만 있다면 누구든지 휴먼북이 될 수 있다. 교직에 종사했던 은퇴자가 학생들에게 진로 상담을 하는 것처럼, 자신의 사소한 경험도 타인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휴먼 라이브러리를 통해 독자만 이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과정에서 휴먼북도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우리 지역의 사회적 배려대상자가 꿈조차 꿀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휴먼북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재능·지식·지혜 등을 통해 그들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바꾸어줄 수 있다면 휴먼북 클럽의 탄생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이런 커뮤니티가 지역 곳곳에 생겨 두 갈래의 길에서 고민하는 직장인이나 학생에게 바람직한 길을 제시하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으면 좋겠다. 혹시 아는가, 여기서 자신이 원하는 멘토를 만나 정말 소중한 팁을 얻을지. 경험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지혜다.

아름다운 인생학교 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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