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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Review] 옛사람 발길을 따라가며 마음을 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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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조선의 문화공간

이종묵 지음, 휴머니스트,
전4권, 각권 460∼544쪽, 각권 2만∼2만3000원

"이 책은 관광(觀光)을 위한 것이다. 관광은 빛을 본다는 뜻이다. 빛은 문명이다. 문명을 보기 위해 눈과 다리만 가서는 안된다. 마음이 따라가야 한다. 마음은 글에 있다. 옛사람이 사랑한 땅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마음으로 그 빛을 보아야 한다."

조선시대 한문학 전공자인 이종묵(45.서울대 국문학과) 교수가 '조선의 문화공간' 전 4권을 한꺼번에 쏟아내며 한 말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널리 알려진 문구의 이종묵식 표현이다.

옛 문헌 속에서 찾아낸 문명의 빛을 저자는 옛날 이야기 하듯 술술 풀어낸다. 조선의 빛을 수놓은 선비 87명의 삶과 생각을 그들이 실제 살았던 공간을 배경으로 재구성했다. 저자가 소개하는 옛 문화공간은 여전히 우리 곁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 땅에 스며있는 의미를 알지 못하기에 무심코 지나치는 곳들이 많다. 저자는 '문헌 답사'의 형식을 통해 조선 500년의 역사.문학.철학 속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사실 문화유적을 직접 가봐도 몇 백년 전 세상을 떠난 이의 자취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후대인들이 그 곳을 찾는 이유는 거기 살던 사람에 관한 기억이 역사 혹은 문학이란 이름으로 시대를 뛰어넘어 아름답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같은 오래된 기억을 더욱 풍성하게 환기시킨다.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 보면 우리 땅 곳곳에 녹아있는 선인들의 자취가 새롭게 느껴진다. 서울 인왕산만 해도 세종의 셋째 아들로 시서화(詩書畵)에 일가를 이뤘던 안평대군의 풍류와 꿈과 회한이 짙게 남은 곳임을 알게 된다. 15세기 중반 안평대군은 지금의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무계동(武溪洞)'이라 새겨진 작은 바위 옆에 살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인왕산을 좋아한 명사로는 이항복이 꼽힌다. 이항복의 호 필운(弼雲)은 필운산(임금을 보필하는 산이란 뜻.인왕산의 다른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는 혼인 이후 필운대 아래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의 배화여대 안이다. 선비들은 산과 물을 좋아했다. 귀거래사를 읊으며 산수가 뛰어난 곳으로 은거하는 것을 멋으로 여겼다. 남산의 김안로, 낙산의 신광한, 압구정의 한명회, 화담과 서경덕, 지리산과 조식, 청량산과 퇴계, 하회마을과 유성룡 등 잘 알려진 이들은 물론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도 많다.

글과 기록의 힘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확인한다. 글을 남긴 이만이 기억된다. 고향의 정취를 시나 산문으로 남긴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선비들은 유배나 전란의 와중에 처해서도 많은 글을 남겼다. 본인이 남기지 않으면 그를 아끼는 다른 사람이라도 남겨야 그가 기억된다. 그렇게 남겨진 글에 힘입어 그들의 삶의 흔적은 몇 백년이 흘러 문화공간으로 되살아났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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