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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캉캉,퍽탄,제비,공주…닉네임으로 통하는 댄스계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강신영의 쉘 위 댄스(58)

아내와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부부 댄스반에 5년 다녔다. 아내는 다른 취미를 갖고 싶다고 했다. 부부반인데 아내가 못 나간다면 나 혼자만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댄스동호회라는 게 있다고 조언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과연 댄스 동호회가 여럿 있었다. 그중 내게 적당할 것 같은 댄스동호회 하나를 골랐다.

당시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던 시절이라 부하 직원에게 대신 가입신청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소정의 신상을 등록하고 가입 절차를 마쳤다, 그리고 모이는 날짜와 시간을 통보받아 드디어 댄스동호회에 나갔다. 그런데 모두가 "캉가루님 반갑습니다"라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캉가루라니, 내가 왜 캉가루지' 했더니 "닉네임을 캉가루로 등록했잖아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닉네임은 그냥 형식적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실제 통용되는 이름이었다. 부하 직원은 호주 유학파 출신으로 내가 영어로 성이 'Kang' 이므로 내게 묻지도 않고 닉네임을 호주에 흔한 동물인 캉가루로 적은 것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캉가루로 불렸다. 그런데 뒤풀이 자리에서 누군가가 캉가루를 콩가루로 놀려 닉네임을 바꿔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그러나 내 머리 속에서 나오는 닉네임은 이미 누군가가 쓰고 있었다. 기껏 새로운 닉네임을 말하면 어울리지 않는다며 회원들이 반대했다. 당시 파트너의 제안으로 어차피 '캉'이라는 글자가 깊이 인식되어 있으니 '캉'을 하나 더 해서 '캉캉'으로 하기로 한 것이다. 성이 영어로 'Kang'이므로 두 번 반복하면 'Kang Kang'이 된다. 결국 인터넷에 하나뿐인 이 닉네임은 성공적인 닉네임이 되었다. 캉캉이라는 춤도 있고 춤 세계에서 활동할 닉네임이므로 여러모로 잘 어울렸다. 한번 들으면 쉽게 인식이 되는 닉네임이라 만족스러웠다.

닉네임이 처음에는 좀 이상했지만,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가면무도회처럼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댄스파티에 참가하는 모임이 있는 것을 보면 익명성은 필요한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사진 unsplash]

닉네임이 처음에는 좀 이상했지만,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가면무도회처럼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댄스파티에 참가하는 모임이 있는 것을 보면 익명성은 필요한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사진 unsplash]

댄스계에서 닉네임을 쓰는 이유는 여럿이다. 우선 실명은 한번 들어도 기억하기 어렵다. 동호회의 특성상 여러 계층 여러 나잇대 사람이 어울리는데 실명으로는 호칭이 어렵다. 실명 뒤에 '님'이나 '선생님'을 붙이기도 하지만 역시 기억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무엇보다 댄스를 한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실명을 감추는 사람도 많다. 닉네임은 익명성의 장점이 있는 것이다. 당시로는 처음 대하는 별세계였다. 처음에는 좀 이상했지만, 그렇게 쓰다 보니 자연스러워졌다. 가면무도회처럼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댄스파티에 참가하는 모임이 있는 것을 보면 익명성은 필요한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닉네임을 보면 대략의 나잇대를 짐작할 수 있다. 여성은 꽃 이름을 많이 쓴다. 장미, 또는 영어로 해서 로즈, 그리고 제비꽃, 마가렛, 팬지, 데이지 등 꽃 이름을 쓴다. 당시에는 50대 여성이 꽃 이름을 많이 썼다. 그 또래에서 에르메스, 샤넬 등 명품 브랜드를 닉네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등 보석 이름을 쓰는 여성도 나름대로 나잇대가 비슷했다. 20대~30대는 다양한 예쁜 닉네임을 사용했다. ‘별이 되어’, ‘이른 아침’ 등이다.

아카데미 7개 부문 수상에 빛나는 ‘늑대와 춤을’이라는 영화를 보면 수족 인디언들의 이름이 재미있다. 케빈 코스트너가 연기한 던바의 수족 이름인 ‘늑대와 춤을’도 그렇지만, 아내 ‘주먹쥐고 일어서’는 핍박받던 그녀가 갑자기 일어서 가해자에게 대들던 일에서 이름이 생겼다고 했다. 그 외에도 ‘발로 차는 새’, ‘머리속에 부는 바람’, ‘열 마리 곰’도 재미있다. 그들에게는 닉네임도 아니고 정식 이름인 것이다. 인간에게 이름이 부여된 지도 오래 되지 않은 모양이다.

미국 영화 ‘키핑 룸(The Keeping Room)’을 보면 어거스타라는 여인은 북군 남자와 총을 맞대고 선다. 그리고는 서로 이름을 묻는다. 곧 죽일 사람이라도 이름은 알아야 하는 모양이다. 서양에선 처음 대하는 사람의 이름을 먼저 묻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천주교인은 세례명을 그대로 쓰기도 했다. 댄스계 이름이므로 ‘댄싱킹’, ‘댄싱퀸’ 등도 여러 사람이 썼다. 남자는 호나 자를 앞에 쓰는 경우가 좀 있었다. 닉네임으로 통하다 보니 정작 실명을 몰라 벌어지는 해프닝도 많다. ‘저승사자’라는 닉네임을 장난처럼 지었다가 어느 장례식장에 인편에 봉투만 보냈는데 부의금 명부에 적으려니 실명을 몰라 ‘저승사자’라고 써서 실소를 자아낸 일화도 있다.

자신을 낮춘다고 닉네임을 장난스럽게 지은 사람도 있다. ‘퍽탄’이라고 닉네임을 지은 사람이 있는데 어딜 가나 퍽탄 대접을 받는다. 그만큼 닉네임도 자신을 나타내는 이름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닉네임은 4음절이 넘으면 부르기 어려워진다. 두 음절이 가장 적당하다. 4음절이 넘으면 약자로 부르게 된다. ‘제비꽃’은 ‘제비’만 부르게 되고 ‘잠자는 공주’라고 닉네임을 지었다면 편의상 ‘공주’로 부르게 되는 것이다. 미국 사람들이 ‘Robert’를 약해서 ‘Bob’, ‘Kimberly’를 ‘Kim’, ‘Benjamin’을 ‘Ben’이라고 부르는 것도 비슷하다.

영화 '늑대와 춤을’에는 재미있는 이름들이 등장한다. '늑대와 춤을', '주먹쥐고 일어서', '발로 차는새', '머리속에 부는 바람' 등 그들에게는 닉네임도 아니고 정식 이름이다. [사진 영화 '늑대와 춤을' 스틸]

영화 '늑대와 춤을’에는 재미있는 이름들이 등장한다. '늑대와 춤을', '주먹쥐고 일어서', '발로 차는새', '머리속에 부는 바람' 등 그들에게는 닉네임도 아니고 정식 이름이다. [사진 영화 '늑대와 춤을' 스틸]

한국 이름은 서양 사람에게는 도저히 기억하기 어려운 난점이 있다. 발음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이름 대신에 성을 부르는데 우리나라에는 가장 많은 6대 성인 ‘김·이·박·최·정·강’처럼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게 문제다. 그럴 때 서양식 닉네임이 큰 도움이 된다. 천주교인이 쓰는 세레명은 곧바로 귀에 들어온다며 반긴다.

우리나라 이름은 태어날 때 할아버지 같은 어른이 지어주는 경우가 많다. 남존여비 사회일 때는 여자아이 이름은 그야말로 성의 없이 지어졌다. 여자 이름 끝에 ‘자’, ’순‘, ’숙‘ 등이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딸은 그만 낳고 아들을 낳고 싶은 마음에 ‘끝순이’, ‘말자’ 등으로 이름 지은 경우도 많다. 또, 그 당시에는 좋은 이름이거나 예쁜 이름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촌스럽다거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킨 범죄자 이름과 같거나 비슷해 놀림감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개명 신청을 한다.

본명 외에 이름을 하나쯤 더 가져본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수동적으로 집안 어르신이 지어준 이름이 아니고 내가 내 의사로 스스로 짓는 것이다. 평소 존경하는 사람의 이름이나 좋은 이름이라고 부러워하던 이름을 자신의 닉네임으로 써 보는 것이다. ‘정경부인’, ‘평강공주‘. ’백설공주’ 등 꿈속에서 바라던 호칭을 쓰는 경우도 그런대로 좋아 보인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나 스포츠 스타, 좋아하는 영화배우 이름도 그럴싸하다. 법적이나 행정적으로 등록하는 것이 아니므로 자유롭게 지어서 사용하면 된다.

닉네임 사용은 처음에는 좀 어색하지만 자꾸 써 보면 익숙해진다. 나이 들면 누구나 ‘~사장님’이 호칭으로 붙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도 재미없다. ‘~선생님’도 호칭으로 자주 쓰이는데 교사 출신도 아닌데 그것도 역시 재미없다. 나이 차이가 날 때도 닉네임 호칭이 좋다. ‘~님’만 붙이면 된다.

댄스 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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