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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 1만원 소년공 이재명…사진엔 지하방 탈출날 식사 풍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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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토론회에 참석한 변호사 시절의 이재명 경기지사. 이재명 지사 측 제공

1990년 토론회에 참석한 변호사 시절의 이재명 경기지사. 이재명 지사 측 제공

“흙수저 비주류지만 위기를 기회로 바꾸며 성과를 만들어 온 이재명이야말로 위기의 대한민국을 희망민국으로 바꿀 수 있다”(1일 출마선언문)

1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재명 경기지사의 젊은 시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가난’이다. 2017년 대선 때도 “나는 흙수저보다 더 낮은 무수저”라고 한 그의 말이 반향을 일으켰다. 가난은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됐다.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선 이 지사 후원회 이름도 ‘흙수저 후원회’였다.

이 지사는 1963년 10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너무 가난해 어머니는 그의 생일도 잊어버렸다고 한다. 그가 6세 때인 1968년 학교 등록을 위해 생년월일이 필요하자 역술인을 찾아가 생일날짜를 새로 정했다. 그게 음력 10월23일이다. 삼계국민학교(현 삼계초등학교)에서 소년기를 보낸 이 지사는 졸업 직후 가족들과 함께 경기도 성남으로 이사했다.

1980년 성남으로 이사온지 4년 만에 지하를 벗어나 처음 1층으로 이사한 날, 가족들과 이재명 지사(왼쪽에서 두 번째). 이재명 경기지사 측 제공

1980년 성남으로 이사온지 4년 만에 지하를 벗어나 처음 1층으로 이사한 날, 가족들과 이재명 지사(왼쪽에서 두 번째). 이재명 경기지사 측 제공

그곳에서 이 지사는 중학교 입학도 포기한 채 일에 매달려야 했다. “한때 대학물을 먹었다는 아버지가 자식들을 학교로 보내지 않고 공장에 나가게 했으며, 공장을 그만두고 쉬기라도 하면 무조건 아버지의 리어카를 밀어야 했다. 폐지를 줍고 쓰레기 더미를 치워야 했다.” 2018년 출간된 에세이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에 나오는 회고다.

소년공 이재명의 첫 직장은 집 근처(성남 상대원동)의 목걸이를 만드는 이름 없는가내수공업장이었다. 월급 1만원을 받고 황동선을 납과 염산으로 땜질했다. 1년쯤 다녔지만 사장의 야반도주로 세달치 월급을 떼였다고 한다.

1980년 시계공장 오리엔트 재직 시절 동료들과 야유회에 참가한 이재명 경기지사(왼쪽 끝). 이재명 경기지사 측 제공

1980년 시계공장 오리엔트 재직 시절 동료들과 야유회에 참가한 이재명 경기지사(왼쪽 끝). 이재명 경기지사 측 제공

두 번째로 취직한 ‘동마고무’에서는 벨트 속으로 손가락이 말려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이 지사는 “지금도 지문 없는 손가락 안에 상처와 함께 아물어버린 까만 고무 가루들이 수없이 박혀있다”고 기억했다. 냉장고를 만드는 ‘아주냉동’에 들어갔을 땐 월급(7만5000원)이 크게 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가 도산했다.

이후 가죽 재단 프레스공으로 취직한 ‘대양실업’에서 이 지사는 두 번째 산업재해를 당했다. 프레스에 눌려 손목뼈 하나가 부러졌다. 사고 후 30분 당겨진 퇴근 시간 덕에 이 지사는 고입 검정고시를 볼 수 있었다. 이후 시계회사인 ‘오리엔트’에 입사했다.

1982년 모친 구호명 여사(지난해 별세)와 중앙대 입학을 위해 학교를 찾은 이재명 경기지사. 이 지사는 당시 처음 맞춰 입은 교복을 입은 데 대해 "쑥스러웠다"고 기억했다. 이재명 경기지사 측 제공

1982년 모친 구호명 여사(지난해 별세)와 중앙대 입학을 위해 학교를 찾은 이재명 경기지사. 이 지사는 당시 처음 맞춰 입은 교복을 입은 데 대해 "쑥스러웠다"고 기억했다. 이재명 경기지사 측 제공

이재명 경기지사와 어머니. 이재명 경기지사 측 제공

이재명 경기지사와 어머니. 이재명 경기지사 측 제공

자서전 중 이 시기를 다룬 부분엔 어머니에 대한 회상이 잦다. “살림하랴, 돈 벌랴 항상 바쁘고 힘드셨지만 자식들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셨다. 팔을 다쳤을 때는 한 손에 도시락을 들고 한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은 채 매일 공장까지 데려다 주셨다. 대입 검정고시 원서에 쓸 도장을 새기라고 1000원을 내주신 분도 어머니였다.” 1982년 중앙대 법대에 진학했을 때 학교를 함께 찾은 것도 어머니였다.

사법연수원 졸업식 당시의 이재명 경기지사(왼쪽). 이재명 지사 측 제공

사법연수원 졸업식 당시의 이재명 경기지사(왼쪽). 이재명 지사 측 제공

1987년 사법연수원 동기들과 이재명 경기지사(첫째줄 왼쪽에서 두 번째). 이재명 경기지사 측 제공

1987년 사법연수원 동기들과 이재명 경기지사(첫째줄 왼쪽에서 두 번째). 이재명 경기지사 측 제공

1986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 지사는 처음엔 여느 합격생과 마찬가지로 판·검사 임용을 희망했다. 하지만 사법연수원 동기들과 진보적인 공부 모임을 하면서 인권변호사로 진로를 바꿨다. 훗날 노동법학회가 된 이 모임엔 현재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정성호 민주당 의원, 문무일 전 검찰총장 등이 함께 했다. 이 지사는 “연수원 시절 ‘변호사는 굶지 않는다’는 믿음을 준 노무현 변호사의 강연이 진로 결정에 한몫했다”고 회고했다.

첫째 아들과 함께 집에서. 이재명 경기지사 측 제공

첫째 아들과 함께 집에서. 이재명 경기지사 측 제공

 두 아들과 함께 낚시하는 이재명 경기지사. 이재명 경기지사 측 제공

두 아들과 함께 낚시하는 이재명 경기지사. 이재명 경기지사 측 제공

 1994년 첫째 아들과 함께. 이재명 경기지사 측 제공

1994년 첫째 아들과 함께. 이재명 경기지사 측 제공

1990년엔 성남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인근 이천시와 광주시의 노동상담소장을 지내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활동했다. 청년 변호사 이재명이 음대 졸업생이던 부인 김혜경 씨를 처음 만난 것도 이 때다. 이 지사는 1995년 성남시민모임 창립 구성원으로 참여하면서 시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다.

2000년 분당 부당용도변경 반대 집회 참석한 이재명 경기지사(오른쪽 끝). 이재명 지사 측 제공

2000년 분당 부당용도변경 반대 집회 참석한 이재명 경기지사(오른쪽 끝). 이재명 지사 측 제공

10년 가까이 시민운동가로 지낸 이 지사가 정치권에 입문한 건 2004년이다. 이 지사는 당시 시민 1만8595명이 만든 주민조례를 성남시의회가 부결시킨 것에 거세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회의장 점거해 수배를 받게 됐을 때 정계 입문을 결심했다.

민주당에 입당해 2006년 성남시장 선거와 2008년 총선에서 잇따라 낙선한 이 지사는 2010년 민선 5기 성남시장에 당선돼 첫 공직을 맡았다. 재선 성남시장 시절이던 2016년 11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가장 먼저 주장하며 전국적 인지도를 얻었고 이듬해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어 3위를 기록했다. “페이스 메이커로 나섰는데 이길 것 같은 착각이 들면서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나섰다. 지금은 왜 그랬나 싶다”는 게 첫 대선 후보 경선에 대한 이 지사의 되새김질이다.

2016년 12월 24일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9차 촛불집회에 참석한 이재명 경기지사(왼쪽)와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가운데)의 모습. 당시 이 지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여권에서 가장 먼저 주장하면서, 일약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게 된다. 중앙포토.

2016년 12월 24일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9차 촛불집회에 참석한 이재명 경기지사(왼쪽)와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가운데)의 모습. 당시 이 지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여권에서 가장 먼저 주장하면서, 일약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게 된다. 중앙포토.

2018년 경기지사에 당선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돼 곤란을 겪었지만 지난해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은 직후부터 이 지사의 지지율은 급등했다.1년 가까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여권 내 차기 대선 주자 선호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 지사는 지난 1일 공식적으로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이렇게 말했다.

“정치적 후광, 조직, 돈, 연고, 아무 것도 없는 저를 응원하시는 것은 성남시와 경기도를 이끌면서 만들어 낸 작은 성과와 효능감 때문일 것입니다. 실적으로 증명된 저 이재명이 대한민국을 위해 준비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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