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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싸우는 배는 돛을 접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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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에서 대선 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에서 대선 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영화 '벤허'에는 노예로 전락한 주인공이 갤리선에서 발이 묶인 채 단체로 노를 젓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이 장면은 영화적 장치, 즉 허구다. 고대 지중해를 주름잡던 갤리선은 통념과 달리 노잡이로 노예가 아니라 자유민을 썼다. 당시 노 젓기는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다. 각자 노 하나씩 잡고 젓는 방식('센실레'라고 한다)이라 자칫하면 노끼리 엉켜 버렸기 때문이다. 노예에게 강제로 맡길 일이 아니었다. 영화처럼 긴 노에 여러 명이 달라붙어 젓는 방식('스칼로치오'라고 한다)은 중세가 끝나갈 때쯤에야 보편화했다고 한다.

정권 무리수가 키운 윤석열 바람 #그러나 바람만으론 이길 수 없다 #구체적 언어로 각론 채워 나가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출마 선언을 보면서 갤리선이 떠오른 이유는 '바람'이란 말 때문이다. 윤석열은 바람이다. 허황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대세라는 뜻은 더욱 아니다. 공기의 밀도가 바뀌면서 바람이 일 듯, 문재인 정부에 대한 대중의 실망이 커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의미다. 내로남불 정권으로부터 탄압받는 정의의 집행자 이미지, 여기에 야권의 대안 부재론이 겹치며 윤석열 바람을 낳았다. 바람을 키운 것은 집권 세력의 비상식적 대응이었다. 일련의 무리수가 거듭되면서 건들바람 정도로 끝날 것 같은 풍세(風勢)는 된바람, 노대바람으로 세졌다.

윤 전 총장은 회견에서 자유·법치· 민주주의·공정·상식 같은 거대 의미를 담은 단어를 주로 썼다. '권력의 사유화' '국민 약탈' '부패완판' 같은 흥분을 자아내는 말이 사용됐다. 여당 및 친여 언론은 알맹이가 없다고 깎아내렸지만, 반문(反文) 바람을 동력으로 삼은 윤 전 총장으로선 당연한 전략이다. 그에 대한 여권 인사들의 저주에 가까운 폄훼, X파일류의 검증되지 않은 의혹 제기는 오히려 역풍을 불러 윤석열호의 돛만 부풀려 줄 수 있다.

하지만 변화무쌍한 것이 바람이다. 선거판에서 대세론을 믿다 순식간에 무너진 주자들이 얼마나 많았나. 윤 전 총장은 "경제 상식을 무시한 소득주도 성장, 시장과 싸우는 부동산 정책, 세계 일류 기술을 사장한 탈원전, 매표에 가까운 포퓰리즘"을 문재인 정부의 문제 정책으로 들었다. 하나같이 현실을 무시한 이념 우선 정책들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만 하면 된다는 안이함은 또 다른 이념의 틀에 갇혀 '스윙 보터' 중도층의 염증을 부를 수 있다.

윤 전 총장의 출마 선언에 대한 평가는 양쪽의 극단적 반응을 제외하면 대체로 '총론은 이해 가나 각론은 글쎄'로 정리되는 듯하다. 각론의 허술함은 그가 극복해야 할 과제다. 30년 동안 법조인으로 살아온 그의 세계관 중심에는 당연히 법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법은 과거를 보지만, 정치는 미래를 향한다. 그의 법 중심 세계관이 현실 정치에서 맞닥뜨릴 다양한 문제에서 과연 어떻게 투영되고 조화를 이룰 것인가, 국민은 궁금하다.

가령 이런 질문이다. 특검 수사로 대기업 총수를 단죄했던 그가 정치 지도자로서는 어떤 기업관과 경제관을 보여줄 것인가. 그의 공정은 어떤 것인가. 경쟁의 형식만을 따지는 공정인가, 경쟁 무대에 오르는 계단까지 살펴보는 공정인가. 이 밖에도 숱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법과 공정, 상식이라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원칙만으론 부족하다. 복잡한 현실과 부딪치는 과정에서 혼란과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충돌을 어떤 구체적 언어로 설명할 것인가 미리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무시하고 지지율로 밀고 가려다 정치는 포퓰리즘으로 빠진다. 지금 정부에서 숱하게 목격했던 과정이다.

갤리선은 평소엔 바람으로 움직이는 범선이다. 하지만 전투가 닥치면 돛을 접는다. 지중해의 변덕스러운 바람이 싸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노잡이들의 실력은 이때 드러난다. 23살의 미당 서정주는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시 '자화상')이라고 읊었다. 공교롭게 딱 23개월 전 조국 씨가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되면서 윤석열의 바람은 시작됐다. 그를 키운 건 바람이지만, 결실마저 바람에 기댈 수는 없다.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