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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세계경제전망

기업 혁신, 경제 성장 멈추는 순간 ‘재패니피케이션’ 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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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의 세계경제전망

김동호의 세계경제전망

세계 경제가 코로나19 충격 와중에도 격변을 멈추지 않고 있다. 미·중 경제전쟁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으로 치닫는 가운데 힘의 균형추는 미국으로 기울어지는 모양새다. 지난 12일 영국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분기점으로 미국이 구심력을 회복하고 중국은 다소 고립되는 양상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의 칼럼니스트 기든 래크먼은 “그간 중국이 ‘서구 선진국은 쇠퇴할 수밖에 없다’고 퍼뜨려왔지만, 미국이 G7 및 아시아의 동료 민주주의 국가들과 뭉치면서 다시 글로벌 리더십을 회복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의 저출산·고령화 파장과 글로벌 인플레이션 우려도 주목할 만한 경제 흐름으로 떠오르고 있다.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면서 독일 중앙은행은 유럽중앙은행(ECB)에 재정지출 축소를 요청했다. 이제는 풀린 돈을 거둬들일 때라는 얘기다.

계속되는 일본 경제의 반면교사 #일본 언론에 한국기업 소식 봇물 #‘일본 기업에는 혁신 없다’ 한탄 #저출산·고령화 문제도 갈수록 심각 #미리 가 본 한국의 미래일 수 있어

1. 역동성 떨어지는 일본

최근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일본은 디지털 후진국’이라는 기획 기사를 썼다. 일본은 코로나19 대응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 배경의 하나로 후진적 디지털 행정력이 거론된다. 1989년 소니의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와 일본의 보수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가 미국을 겨냥해『노(No) 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을 펴낼 정도로 기염을 토했던 일본이 왜 이렇게 됐을까.

일본 기업의 디지털 기술은 여전히 세계 정상급이다. 그러나 ‘일본이 최고’라는 자만심과 기존의 성공 방정식이 걸림돌이다. 1980년대 일본은 미국 경제를 삼킬 듯 팽창하면서 세계 최고로 떠올랐다. 한때 전 세계가 일본 기업의 경영방식까지 모방했다. 재고를 최소화하는 1970년대 도요타자동차의 ‘적시생산시스템(JIT)’이 1990년대 미국·유럽에서는 경영 전반으로 확대 적용된 린(Lean)시스템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FT는 사설에서 “반도체 칩 부족 사태는 이런 믿음을 일거에 무너뜨렸다”면서 “핵심 부품 조달은 안정적 공급망이 있어야 보장되는 시대가 됐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일본은 독자적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조차 키워내지 못해서 한국산 SNS가 수혈되는 처지에 이르렀다. 세상의 변화와 달리 갈라파고스처럼 대면 접촉을 중시한 결과다. 결국 일본은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면서 네이버 라인(Line)에 의존하게 됐다. 일본으로선 씁쓸한 현실이지만,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는 물론 코로나19 대응에도 라인은 핵심적 비대면 소통수단이 됐다.

급기야 일본은 오는 9월 디지털청을 창설한다. 이를 위한 디지털 개혁 관련법이 지난달 12일 국회를 통과했다. 국제경쟁력 강화, 국민의 편리성 향상, 저출산·고령화 과제의 해결에 기여하는 디지털 사회의 사령탑이 돼야 한다고 목표를 세웠다. 니혼게이자이는 “지난 20년은 디지털화에서 일본이 세계의 흐름에서 뒤처진 시대였다. 이제는 그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때 기술력으로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던 일본의 얘기라고는 믿기지 않는 현실이다.

더구나 일본 언론에는 한국 기업 소식이 단골 뉴스로 다뤄진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동향은 빠짐없이 전해진다. 오히려 일본 언론을 보면 한국 경제가 더 입체적으로 보일 때도 있다. 최근 물류센터 화재와 근로자 연쇄 사망 사고로 빛이 바랬지만, 쿠팡의 미국 증시 상장과 관련해 니혼게이자이는 ‘아시아 발(發) 유니콘의 진가’라는 기사의 대표 사례로 꼽았다. “오늘 주문하면 내일 새벽 배달되고, 현관에 내놓기만 하면 반품되는 서비스가 택배 사업의 상식을 뒤집었다”면서다. 한국에서는 구글ㆍ아마존에 맞서 크래프톤 등 유니콘이 속속 등장하는데 일본에서는 왜 이런 혁신이 안 되는지를 묻고 있다. 결국 기업 혁신과 경제 성장이 멈추면 재패니피케이션(만성적 경제 활력 둔화 현상)을 피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나마 한국이 더 나은 것은 첨단 제조업과 신생 기업의 혁신 능력 정도라고 할 수 있다.

2. 저출산·고령화 쓰나미

일본은 저출산·고령화가 심각해지고 있다. 일본 국회는 최근 75세 이상 고령자의 의료비 본인 부담률을 올리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제도가 시행되면 75세 이상 인구는 연금을 포함한 연간 소득이 200만엔(2000만원) 이상일 때 의료비 본인 부담금이 현행 10%에서 20%로 늘어난다. 폐지나 깡통을 주어 생계를 유지하는 ‘빈곤 노인’이 넘치는 일본에서 상당수 고령자가 생계비를 쪼개 의료비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를 통해 절감하는 의료비는 고작 연간 830억엔(약 8300억원)이다. 이렇게 마른 수건이라도 짜야 하는 이유는 인구감소 문제와 얽혀 있다. 저출산이 지속한 일본에서는 고령자의 의료비 부담을 늘리지 않으면 현역세대가 그 부담을 감당할 수 없게 됐다. 지난해 일본 인구가 0.7%(87만명) 감소하면서 세계 인구 순위가 10위에서 11위로 밀려난 여파다. 일본은 지난해 신생아 수가 84만명에 그쳤다. 한 해 120만명 넘게 태어났던 1980년대 고도성장 시절의 3분의 2토막이다. 출산율은 최근 5년 연속 낮아져 1.34를 기록했다. 4차 산업혁명과 인구 감소가 맞물리면서 젊은 층의 일자리는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미 잠재성장률이 1%로 추락한 일본으로선 아무리 애써도 저성장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현실에 직면했다.

이 모습은 조만간 현실화할 한국의 미래다. 700만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가 빠르게 고령화하고, 해마다 수십조원을 투입했지만, 출산율은 0.8%대로 떨어졌다. 조만간 일본을 덮친 고령자 의료비 대란과 저출산에 따른 경제 역동성 저하의 악순환이 한국에도 쓰나미처럼 몰려올 것이란 점을 일본이 ‘프리뷰’처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중국 역시 비슷한 고민에 빠졌다. FT는 “2019년 중국은 과거 마오쩌둥 시절 파괴적 대약진운동으로 아사자가 속출한 뒤 50여년 만에 처음으로 인구가 줄어들었다”고 보도했다. 중국이 한 자녀 원칙을 고집한 결과로 중국 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했다. 경제의 역동성 저하는 물론이고 연금과 의료비 등 고령자 부양 부담이 늘면서 중국 경제에 무거운 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가 부랴부랴 3자녀 허용 방침을 내놓았지만, 중국 역시 2019년부터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를 열면서 저출산 풍조가 확산하고 있어 결과를 낙관하기 어려워졌다.

간추린 최근 세계 경제 동향

간추린 최근 세계 경제 동향

3. 글로벌 리더로 돌아온 미국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활약이 대단하다. 글로벌 최저 법인세율 15%를 도입하고, 빅테크 기업에 대해서는 매출이 발생한 나라에 세금을 내는 국제 협정을 주도하고 있다. 기존 조세체계의 빈틈이나 조세피난처를 활용해 세금 부과를 회피하려던 빅테크 기업들이 철퇴를 맞게 됐다. 주요 7개국(G7)은 물론 유럽연합(EU) 회원국 대다수가 이 방안에 찬성표를 던지고 있다. 각국의 법인세를 국제 규범으로 강제하려는 움직임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모든 것을 바이든 대통령이 주도하면서 그야말로 미국이 ‘세계 질서의 축’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다. 2차 대전 이후의 국제 금융 질서를 출발시킨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 출범과 1971년 리처드 닉슨 정부의 금 태환(금 보유량만큼 미 달러화와 교환하는 제도) 정지 선언에 따른 금본위제 와해, 1985년 일본 엔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려 일본 경제 쇠락의 도화선이 됐던 프라자 합의에 견줄 만한 충격파가 예상된다.

최근 인플레이션 이슈의 진앙도 미국이다. 미국 경제가 빠르게 회복하면서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거듭 금리 인상 불가피설을 퍼뜨리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고 연일 경고하고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는 기준금리 인상 시기를 당초보다 앞당긴 2023년 말까지라고 못박았다. 한국은행도 연내 두 차례 금리 인상을 예고했다. 시장 금리는 벌써 뛰고 있다. 3년 만기 국채금리는 19개월 만에 최고치로 치솟았다. 2008년처럼 글로벌 금융시장 발작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 누구든 신속히 빚을 덜어내 충격에 대비해야 한다. 정부가 추진하는 33조원 규모의 추경도 재고할 필요가 커졌다.

미국의 금리 인상에 따라 미 달러화 강세로 돌아설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최근 국내 외환시장에서 달러 환율은 벌써 1130원대로 올라섰다.

김동호 논설위원

김동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