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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혁의 한반도평화워치

일본에 과거사 배상 강요 않겠다고 천명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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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일 관계 회복의 길

이혁 전 주베트남 대사

이혁 전 주베트남 대사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 가장 먼저 미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한 지도자는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였고, 두 번째가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그만큼 한·중·일이 위치한 동북아시아가 국제 정치·안보 역학 구도에서 핵심적 지역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베트남은 한국에 베트남전쟁 사과·보상 요구 없어 #과거사 뒤로하고 한국 협력 통해 발전하려는 전략 #한국도 일본 이기려면 과거사 피해자로서 관용 보여 #도덕적 품격과 자긍심을 일본과 국제사회에 알려야

일본은 현재 미국의 가장 긴밀하고 우호적인 동맹국이며 쿼드(미·일·인도·호주의 협의체)의 일원으로서 미국의 대중 전략 형성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 전략의 역점이 중국이 포함된 아시아·태평양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함의를 가진 인도·태평양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도 결국 중국을 의식한 미·일 공동 전략 구상의 산물로 이해된다. 또 미국은 한·미, 미·일 동맹을 매개로 하는 한·미·일 3각 협력으로 미·중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한다.

현재 한·일 관계는 한·미·일 협력 체제의 가장 약한 고리다. 한·일 관계는 강제 징용 피해자 임금, 군대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로 냉랭한 상태다. 뚜렷한 해결 실마리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깊은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일은 한·미·일 협력 약한 고리

이혁의 한반도평화워치

이혁의 한반도평화워치

중국의 급격한 부상으로 세계 속에서, 그리고 한국의 국익 측면에서 일본의 위상이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저하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현재의 정체된 한·일 관계를 개선하려는 진지하고 실효성 있는 노력을 등한시하는 것은 우리 국익을 크게 손상하게 된다. 오히려 변화된 국제 질서 패러다임 속에서 일본은 새로운 중요성을 띄게 되었고 우리에게 한·일 관계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요구하고 있다.

경제면에서 한국은 스마트폰·가전·조선·자동차 등 제조업 분야뿐 아니라 문화산업 등 많은 분야에서 일본을 따라잡거나 넘어섰지만, 소재·부품·장비와 기초과학 분야는 일본에 미치지 못해 여전히 일본과의 협력이 필요하다. 또 미국 바이든 정부가 중국과의 경쟁에서 군사력 못지않게 과학기술과 경제 분야에도 역점을 두고 있음을 고려할 때 한·일 관계가 회복되면 이 분야에서 양국 간 협력 지평도 확대될 수 있다.

정치·안보 면에서도 긴밀한 한·일 협력은 한·미·일 3각 협력 강화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일본의 긍정적인 기여를 유도할 수 있다. 일본의 전후 최대 외교 과제 중 하나가 북·일 관계 정상화임을 고려할 때, 지금은 북한 핵 문제로 정체되어 있지만, 일본의 대북 접촉이 본격화되면 한반도 질서에 미칠 잠재적 영향력을 결코 가볍게 보면 안 된다.

이처럼 일본과의 긴밀하고 생산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 외교의 체력을 길러 한·미 동맹을 공고화할 뿐 아니라 건강한 한·중 관계 발전을 위한 지렛대가 될 수 있다.

지도자 판단이 한·일 관계 좌우

그러면 한·일 관계를 옥죄는 과거사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과거 한·일 관계를 진전시키는 외교 노력 과정에서 역사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그런 가운데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 간에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은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 표명을 한국이 받아들이며, 한·일이 21세기를 향해 미래 지향의 파트너십을 구축해나가자는 양국 지도자의 결의와 비전을 양국 국민과 국제사회에 발신한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성장기에 겪은 일본 식민 통치의 아픈 경험을 분노의 분출 대신 소중한 교훈으로 삼아 새로운 한·일 관계의 기틀을 만든 지도자였다. 그는 한국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같은 쓰라린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본과의 정상적인 관계 속에서 일본을 객관적으로 보고 교류·경쟁·협력함으로써 일본에 맞설 수 있는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믿음에서 한·일 화해를 추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후 정부가 이어지면서 한·일 관계가 공동선언의 정신을 계승하여 발전해오지 못하고 대체로 하향 곡선을 그려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식민 시대의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지도자들이 이어지면서 오히려 한·일 관계는 조금씩 후퇴해 버렸다.

가해자·피해자 뒤바뀐 과거사 논쟁

우리 사법부의 강제 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과 위안부 합의에 대한 현 정부의 대응이 일본 정부의 강한 반발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일본 내에서 우익 세력의 목소리를 키워주고 한·일 과거사에 대한 수정주의적 역사관을 부각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특히 강제 징용 판결 후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전략 제품 수출 규제 결정은 한국 국민의 일본 여행 거부와 일본 상품 불매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일본 국민의 반한·혐한 분위기도 높아져 일본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반일·반한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이제 일본에는 한국과 과거사에 기인한 부채 의식을 더는 찾아보기 힘들다. 도리어 일본 정부는 ‘불가역적’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을 우리 정부가 해체하여 합의를 위반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 우리 사법부의 징용자 배상 판결과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 판결이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은 과거사 논쟁에서 가해자였던 일본이 피해자였던 한국에 대해 마치 일본이 피해자이고 한국이 가해자라고 주장하는 듯한 형국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정부도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지만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한·일 정부 간에 많은 협의가 있었으나 일본은 전혀 양보할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일본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책을 한국 측에서 제시하라는 입장으로 일관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국제사회나 일본의 대다수 ‘양심 세력’도 한국을 지지하는 상황이 아니다. 한국이 과거와 같이 피해자 프리미엄을 무기로 일본의 양보를 끌어낼 수 있는 형세가 아닌 것 같다. 더구나 일본 정부는 더욱 노골적이고 적극적으로 ‘일본 땅인 독도를 한국이 강제 점거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위안부 모집과 관련한 일본 정부의 직접적인 관여도 부정하고 있다.

과거사를 정치 수단으로 활용 말아야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이런 형국에서 한국이 이기는 길은 역으로 과거사 피해자로서의 관용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도덕적 품격과 자긍심을 일본과 국제사회에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징용자 임금 문제와 관련해 국내적으로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겠지만, 우리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더는 일본에 배상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천명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야 우리의 도덕적 권위가 높아지고 일본 정부와 기업·국민도 한국인에게 큰 고통을 준 과거를 아프게 돌아볼 것이다.

앞으로 우리 정부는 과거사를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 한·일 간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성적 판단보다는 무조건 반일적 대응을 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정부의 인식도 지워야 한다. 돌이켜보면 역대 정부가 한·일 과거사와 관련해 국민감정을 부추기거나 영합하는 조치를 했을 때 일시적으로는 지지도가 올랐지만, 결국 정권에 도움이 되지 않고 한·일 관계만 손상했다는 비판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일 과거사 문제는 최고 지도자가 오피니언 리더가 되어 국익을 우선해 여론을 선도해 나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과거사는 국민감정이 개입된 휘발성 강한 문제이기 때문에 최고 지도자가 나서 국민 정서와 다소 괴리가 있더라도 국익을 우선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정권 차원에서 문제의 본질을 국민에게 성심껏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면 대다수 국민은 이를 받아들일 것이다.

특히 최근 지방법원에서 징용자 문제와 관련한 대법원의 과거 판결을 뒤집는 판결을 내렸고, 상당수 국민에게 ‘과거사 피로’가 내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이 우리 정부가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방향으로 한·일 관계에 임할 호기라고 본다.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정신 되살려야

김대중 대통령은 여론의 우려를 무릅쓰고 일본 문화 개방이란 용단을 내렸다. 결국 일본 문화 개방이 큰 자극제가 되어 일류(日流)를 능가하는 세계의 한류(韓流)가 탄생하지 않았는가? 일본을 극복하고 이기기 위해서는 일본과 경쟁할 뿐 아니라 교류하고 협력해야 한다. 일본이 한국을 자극하더라도 반일 감정 분출만이 해법이 되는 한국이 되어서는 일본을 이길 수 없다.

내가 대사로 재직했던 베트남 정부는 우리 정부에 과거 베트남전쟁 참전과 관련한 어떤 사과나 보상 요구도 하지 않고 있다. 아픈 과거사를 뒤로하고 롤 모델인 한국의 협력과 지원을 통해 빠른 국가 발전을 이루기 위함이다.

이제 정부가 이어질수록 마이너스 유산만 늘어나는 한·일 관계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다. 현 정부의 임기가 1년도 남지 않았지만 한·일 관계가 최악의 상태라고 평가되는 현시점에서 새로운 발상으로 한·일 관계 개선의 계기를 마련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일은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정신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고 살아 숨 쉬어 나가야 하는 관계다.

이혁 전 주베트남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