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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으로 연설 시작 尹…日과 실용외교, 바이든 ‘가치동맹’까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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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대선출 마 선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대선출 마 선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29일 정치 선언 연설 도입부는 천안함 폭침 사건과 K-9 자주포 폭발사고로 채워졌다. 총장 퇴임 뒤 만난 많은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하면서다.
“천안함 청년 전준영은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K-9 청년 이찬호는 억울해서가 아니라 잊히지 않기 위해서 책을 썼습니다. 살아남은 영웅들은 살아 있음을 오히려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국가를 지키고 국민을 지킨 우리를 왜 국가는 내팽개치는 거냐고”

윤석열 정치선언 속 숨은 외교안보 코드

앞서 윤 전 총장은 지난 현충일을 계기로 두 사람을 만나 안보를 강조했는데, 이를 그대로 연설문에 담은 것이다. 그는 두 청년에 대해 “대한민국을 만들고 지킨 영웅들”이라며 “저 윤석열은 그분들과 함께 하겠다”라고도 말했다.

인양된 천안함 선체에서 군 요원들이 조사작업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인양된 천안함 선체에서 군 요원들이 조사작업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날 윤 전 총장의 정치 선언은 대부분 국내적 사안과 관련한 내용으로 이뤄졌지만, 곳곳에 외교·안보 코드가 숨어 있었다. 특히 연설을 천안함 폭침 사건으로 시작한 것은 대선 주자로 나설 경우 외교·안보 분야에서의 경험 부족이 약점 중 하나로 꼽힐 수 있다는 점을 의식, 첫 출발부터 확고한 안보관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정권 교체를 바라는 보수표 결집을 위한 포석이다.

특히 윤 전 총장은 연설 중 “국제 사회는 인권과 법치,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 사이에서만 핵심 첨단기술과 산업시설을 공유하는 체제로 급변하고 있다”며 “이제는 전쟁도 총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반도체 칩으로 싸운다”고 진단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지난 2월 백악관에서 반도체 칩 부족 대응 회의를 주재하며 직접 칩을 들어보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지난 2월 백악관에서 반도체 칩 부족 대응 회의를 주재하며 직접 칩을 들어보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강조하는 ‘가치동맹’의 개념을 짚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반도체를 비롯한 신산업 기술은 바이든 대통령이 중국의 버릇을 고쳐놓겠다고 벼르는 분야다. 이를 위한 핵심은 ‘힘의 우위’인데, 바이든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ㆍ우방국들과 연합해 이런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를 통해 중국이 교란해온 글로벌 공급망의 규범을 다시 세우겠다는 구상이다.

윤 전 총장이 이제 안보와 경제를 분리할 수 없다며 “국제 사회에서도 대한민국이 문명국가의 보편적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분명한 입장을 보여야 한다.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 확고한 정체성을 보여줘 적과 친구, 경쟁자와 협력자 모두에게 예측 가능성을 줘야 한다”고 말한 것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열린 대선출마 선언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뉴스1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열린 대선출마 선언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뉴스1

특히 '정체성'과 ‘예측 가능성’을 강조한 것은 원칙에 기반을 둔 외교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취해온 미ㆍ중 간 전략적 모호성의 가장 큰 맹점은 예측 가능성 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사안별로 미국과 중국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정책은 미국으로부터는 신뢰를 잃고, 중국에는 과도한 기대를 심어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돼 왔다. 보편적 가치인 인권 분야에서도 북한이나 중국 인권 문제라면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게 대표적이었다.

그러면서 그가 ‘적’을 언급한 것은 북한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윤 전 총장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어떻게 보는지 묻는 질문에 확고한 안보 태세 유지와 평화를 위한 협력 모색을 동시에 하겠다는 다소 원론적인 입장을 내놨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노동당 전원회의를 마친 뒤 당 중앙위원회 간부들과 국무위원회 연주단 공연을 관람했다고 조선중앙TV가 22일 보도했다. 사진은 공연 도중 손뼉을 치는 김 위원장.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노동당 전원회의를 마친 뒤 당 중앙위원회 간부들과 국무위원회 연주단 공연을 관람했다고 조선중앙TV가 22일 보도했다. 사진은 공연 도중 손뼉을 치는 김 위원장. 연합뉴스

그는 “검찰총장 인사청문회 때도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했지만, 주적이 있고 적의 실체를 알아야 우리가 대처할 수 있다”면서도 “군사적으로 주적이라고 해도 한반도의 지속적인 평화를 구축해나가기 위해 협력할 것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만 김 위원장 개인에 대한 평가는 자제했다. “한 국가 지도자에 대해 막연한 환상이나 부정적 생각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국가를 끌고 나가는, 어떤 국가적 행위를 하는 것을 보고 판단할 문제”라면서다.

윤 전 총장은 한ㆍ일 관계의 현주소에 대한 질문에는 “외교는 실용주의, 실사구시, 현실주의에 입각해야 하는데 이념편향적 죽창가를 부르다 여기까지 왔다”며 현 정부의 대일정책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숨기지 않았다.

일본이 수출규제 보복조치를 발표한 직후인 지난 2019년 7월 조국 민정수석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글들. 사진 조국 페이스북 캡처

일본이 수출규제 보복조치를 발표한 직후인 지난 2019년 7월 조국 민정수석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글들. 사진 조국 페이스북 캡처

이어 그는 “한ㆍ일 관계는 과거사는 과거사대로 우리 후대가 역사를 정확히 기억하게 하면서, 미래 세대를 위해 실용적으로 협력해야 하는 관계”라며 “한ㆍ미 관계처럼 한ㆍ일 관계도 국방ㆍ외교 2+2(협의 채널), 혹은 국방ㆍ외교ㆍ경제 3+3(협의 채널) 등의 정기적인 정부 당국자 간 소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다소 전향적인 구상도 내놨다.

다만 “이 정부 들어 망가진 위안부 문제, 징용 문제 등과 안보협력이나 경제 무역 문제 등 현안들을 모두 다 하나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그랜드 바겐을 하는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랜드 바겐’은 북한 비핵화 협상과 관련해 주로 쓰는 표현이다.
아직 외교적 표현에서 다소 미숙함을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외교가에선 윤 전 총장이 의미한 바를 ‘고르디우스의 매듭’(문제가 너무 복잡하게 얽혀있어 칼로 한 번에 잘라버리듯 대담한 해결책이 필요한 난제)을 끊어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하는 분위기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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