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맏며느리 고두심 "일흔에 멜로? 그런 사랑도 있죠"

중앙일보

입력 2021.06.29 11:57

영화 '빛나는 순간'에서 주연 (오른쪽부터) 고두심·지현우가 숲속 상사화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사진 명필름]

영화 '빛나는 순간'에서 주연 (오른쪽부터) 고두심·지현우가 숲속 상사화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사진 명필름]

“손주뻘이고 뭐고 멜로? 못할 게 뭐 있니, 그랬죠. 고두심도, 영화 속 고진옥도, 일흔 먹은 척박한 삶에서 여자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빛나는 순간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행동과 감성이 나왔다고 생각해요. 흔치 않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잖아요.”

30일 개봉하는 영화 ‘빛나는 순간’(감독 소준문)에서 70대 제주 해녀 진옥이 되어 상대역 지현우(37)와 33살 차 로맨스에 도전한 배우 고두심(70)의 말이다. 1972년 MBC 5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해 연기인생 49년. 곽지균 감독 영화 ‘이혼하지 않은 여자’(1992) 이후 29년만의 멜로 연기다.

30일 개봉 영화 '빛나는 순간' 주연
70대 해녀 맡아 33살차 지현우와 멜로
"'전원일기' 22년 하느라 멜로 목말라
고향 제주도서 힐링하듯 찍었죠"

엄마 얼굴, 연애할 얼굴 따로 있나요

21일 서울 평창동 자택 근처 카페에서 만난 그는 ‘국민엄마’란 수식어 탓에 멜로물을 많이 못한 한을 드디어 풀었다며 활짝 웃었다. “‘전원일기’ 22년 맏며느리상이어서 그랬는지 멜로는 안 주고 애기 딸린 엄마 역할로 가더라”며 “대한민국 감독들은 눈이 뼜냐고. 어떤 얼굴은 엄마 얼굴이고 어떤 얼굴은 연애할 수 있는 얼굴이냐”고 그간의 서운함도 농담 반 털어놨다.

영화 '빛나는 순간'에서 70대 제주 해녀가 되어 멜로 연기에 도전한 배우 고두심을 21일 서울 평창동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 명필름]

영화 '빛나는 순간'에서 70대 제주 해녀가 되어 멜로 연기에 도전한 배우 고두심을 21일 서울 평창동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 명필름]

제주 출신인 그에겐 더욱 각별한 영화다. 각본을 겸한 소준문 감독은 14일 시사회 후 기자간담회에서 “검은 현무암 돌덩이 같은 제주 해녀들의 모습 이외에 숨겨진 감정, 들꽃 같은 모습이 있지 않을까 했다”면서 “사회적으로 상처입은 세대들이 서로 위로하고 상처를 치유할 때 비로소 아름다운 사랑이 완성되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만들었다. 고두심 선생님이 안 계셨으면 불가능했다”고 밝힌 바다.

“감독님이 머리에 매일매일 나를 그리면서 썼다더라고요. 제주도 하면 고두심이고, 고두심 하면 제주의 풍광이다. 이런 얘기에 나 못 해요, 할 사람 없지 않을까요?” 고두심의 말이다.

'가족의 탄생' 20살차 넘은 33살차 러브스토리 

'빛나는 순간'에서 고두심은 평생을 물질하며 가족에 헌신한 해녀 진옥을 연기했다. [사진 명필름]

'빛나는 순간'에서 고두심은 평생을 물질하며 가족에 헌신한 해녀 진옥을 연기했다. [사진 명필름]

그는 15년 전 영화 ‘가족의 탄생’에서도 배우 엄태웅과 극 중 20살 차 커플로 출연했다. 당시 연인의 누나(문소리)와 관계가 더 부각됐던 것에 비해 이번 영화에선 멜로 문법에 보다 충실한 감정선을 그렸다.

바다에서 숨 오래 참기로 기네스북에 오른 해녀 진옥은 서울에서 자신을 취재하러 온 방송 PD 경훈(지현우)을 처음엔 밀어내지만 바다에 빠진 경훈을 구해내며 그가 자신과 같은 아픔을 가졌음을 알게 된다. ‘진옥 삼춘(가까운 손위 어른을 일컫는 제주말) 매니저’를 자처하며 동네 해녀들에게 곰살맞은 경훈이, 진옥은 점점 남달라진다. 경훈을 살려내려 했던 인공호흡이 나중엔 수줍은 입맞춤으로 발전한다.

뽀뽀 연기, 하면 모성애만 떠올렸던 그에게 ‘국민엄마’를 벗은 ‘빛나는 순간’은 달랐다.

'빛나는 순간'에서 진옥과 경훈이 단둘이 숲에 간 장면. [사진 명필름]

'빛나는 순간'에서 진옥과 경훈이 단둘이 숲에 간 장면. [사진 명필름]

나한테 이런 표정이, 싶던 장면은.

“평상 장면은 표현이 ‘조오금’ 모자랐는데 경훈이 진옥 귀 파줄 땐 정말 좋았다. 곶자왈 숲속에 드러누웠을 땐 나이 그런거 상관없고 사랑하는 사람과 있는 기분이었다. 근데 그때 ‘동백충(동백나무에 서식하는 차독나방 유충)’이 오른 것 아닌가! 옻 오르는 것처럼 얼굴만 빼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다. (해녀) 고무옷 입는데 너무 쓸려서 매일 보건소 가서 주사맞고 약 먹으며 촬영했다.”(웃음)

“제주도에선 말하지 말라며 ‘속심헙서예’라고 하거든요. 연애하고도 너무 좁은 지역이어서 소문나면 사랑도 변하는 거라….” 그는 “잊어버릴 나이도 돼서 어릴 때 그 감정 막 끄집어낸다고 애 좀 먹었다” 했지만 상대역 지현우는 “선생님 얼굴에서 소녀가 보여 뭉클했다”고 돌이켰다.

고두심·지현우 주연 영화 '빛나는 순간'. [사진 명필름]

고두심·지현우 주연 영화 '빛나는 순간'. [사진 명필름]

고두심은 “지현우씨가 진짜 외유내강”이라 칭찬했다. “겉모습은 애리애리해서 과연 저 사람과 그런 게 될까, 했는데 점점 빠져들었다. 어떻게 하면 인물에 다가갈까 고민하면서 해녀 삼춘들한테 쭈뼛쭈뼛 곰살맞게 구니까 할머니들은 귀엽고 좋아서 속에 있는 얘기도 많이 해주시고. 그런 공부를 알아서 잘하더라. 그런 강인함이 믿음이 갔다”면서다.

극 중 사랑을 어떻게 해석했나.    

“생과 사를 넘나드는 할머니로서 진옥은 못할 게 없다. 경훈의 그 아픔까지 보고 내 속에 뭔가 끄집어내서 쟤를 살릴 수 있다면 해줘야겠다. 그렇게 딱 마음먹는다. 그런데서 경훈은 안도하고 기대고 싶고. 그런 사랑 아니겠나.”

바다에서 죽을 뻔한 공포 이겨내고 물질 촬영 

영화에 나오는 진옥의 젊을 적 흑백사진은 고전무용을 했던 열여덟아홉 무렵 그의 얼굴에 해녀옷을 입은 지금 몸을 합성한 것. 진옥이 물질하는 장면은 고두심이 직접 연기했다. 중학교 때 바다에 휩쓸려 겨우 살아나온 뒤론 물을 무서워했던 그다. 영화 ‘인어공주’(2004)에서 젊을 적 해녀였던 세신사 엄마를 연기했을 땐 큰마음 먹고 필리핀까지 촬영을 갔지만, 공포로 새하얗게 질린 탓에 결국 입수 장면을 포기했다.

이번엔 “내 나이가 몇인데 지금에 와서 뒷걸음질 치면 눈 감을 때까지 못할 것 같아서 이 악물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했다”고 그는 말했다. “독기를 품었죠. 제주도 고향 바다고, 해녀 삼춘들이 포진해 있는데 나 하나 안 건져주겠나, 했어요.” 잠수하다 숨을 틔어내는 ‘숨비소리’는 “40~50년간 평생 하신 분들의 소리를 똑같이 내기는 어려워서 삼춘들 소리를 (내 소리에) 입히긴 했다”고 설명했다.

뼈에 박혀있던 4·3비극…없던 대사 절로 나와

극 중 경훈과 방송 인터뷰 중 제주 4‧3사건을 떠올리는 장면에선 대본에도 없던 대사가 줄줄 나왔단다. “난 그냥 내 얼굴이 싫어 미워. 우리 어머니, 아버지… 나만 아니었어도 그날에, 그 봄, 엄청 잔인했지. 산속에 숨어 있었는데…” 하며 진옥이 젖먹이 시절 부모가 총 맞아 죽어갔던 기억에, 자신의 딸을 바다에서 잃은 죄책감을 한데 쏟아내는 장면이다.

영화 '빛나는 순간'에서 진옥이 태왁에 의지해 물질하는 모습이다. [사진 명필름]

영화 '빛나는 순간'에서 진옥이 태왁에 의지해 물질하는 모습이다. [사진 명필름]

고두심은 “4‧3은 뼈아픈 이야기”라며 “그 슬픔, 아픔을 다 감수했어야 하는 선조들이 안됐고 애처로웠다. 그게 1948년에 일어나고 나는 조금 뒤에 태어났으니까 어릴 때 들은 것이 뼈에, 살에 콕콕 박혀있었는지…”하고 되새겼다. “딱 찍고 내가 어떻게 이걸 했지, 싶었다”면서 “그냥 멍했다. 전 스태프가 올스톱해서 글썽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지현우는 “중간에 제가 질문을 해야 해서 긴장을 잔뜩 하고 찍었는데 저 정도 경지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존경스러웠다”고 했다.

방송3사 연기대상 섭렵…이 영화로 첫 해외수상

이번 영화로 그는 지난 23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폐막한 아시안필름페스티벌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지상파 방송 3사 연기대상을 모두 받은 그의 해외 영화제 첫 수상이다. “고향에서 두 달간 힐링하듯 영화를 찍었다”그는 “지구 반대편에서도 좋게 봐줬다는 데 너무 감사하다”고 수상 소감을 남겼다.

여태껏 삶에서 가장 빛난 순간으론 “아이를 잉태했을 때 너무 신비했다”고 꼽았다. 아이들이 어릴 적 드라마에서 엄마 역할을 하느라 바빠 실제론 “빵점 엄마”라면서도 “우리 딸은 옛날부터 속이 깊다” “미국에 있는 손주들이 보고 싶어 자가격리를 무릅쓰고 다녀왔다”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여자로서 지난 삶 불만족, 연애의 꿈 버리지 않죠  

영화에서 진옥은 경훈을 향한 마음과 자신이 살아온 삶 사이에 갈등한다. [사진 명필름]

영화에서 진옥은 경훈을 향한 마음과 자신이 살아온 삶 사이에 갈등한다. [사진 명필름]

이혼의 아픔을 겪기도 한 그는 여자로서 삶에 대해선 “너무 불만족이다. 남자 보는 눈이 없는 것 같다. 젊은 날로 사실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서 “어디 아프지만 않고 건강하게 있다가 연애할 수도 있겠지, 그런 꿈은 버리지 않는다”고 했다.

또 멜로를 한다면 “누구를 붙여줘도 아름답게 자연스럽게 할 자신이 있다”면서다. “예전에도 어떤 감독님이 고두심 먼저 캐스팅하면 상대 배역 정하기가 힘들어진다기에 내가 ‘감독님, 아무나 붙여줘 봐, 내가 다 맞춰’ 그랬죠.”

최근 배우 박인환이 발레에 도전한 tvN 드라마 ‘나빌레라’와 직접 출연한 ‘디어 마이 프렌즈’(2016) 등을 거론하며 노년층을 아우른 작품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목마름도 드러냈다. “우리나라는 여배우들을 너무 조기에 역할에서 벗어나게끔 하는 게 불만이에요. 물론 시장이 좁아서지만. 나이든 배우에게서 끌어낼 수 있는 좋은 요소를 작가들이 많이 써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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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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