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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후남의 영화몽상

SF영화의 ‘지나간 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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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후남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후남 문화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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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너희 인간들이 상상도 못 할 것을 봤어. 오리온 전투에 참여했고 탄호이저 기지에서 빛으로 물든 바다도 봤어. 그 기억이 모두 곧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2년 전 세상을 떠난 배우 룻거 하우어가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했던 대사다. 그가 연기한 로이는 인간처럼 보이지만 인간은 아닌 존재, 이른바 레플리컨트다. 인간과 달리 이 복제 인간의 제품 수명은 불과 4년. 그 운명을 바꾸려 동료들과 반란에 나섰던 로이는 결국 빗속에서 비장하고 애잔한 최후를 맞는다.

1982년 미국에서 처음 개봉한 ‘블레이드 러너’는 당시 흥행에 참패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걸작’ 대접을 받는 영화다. 특히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외모는 물론이고 희로애락의 감정마저 진하디진한 레플리컨트들의 면모는 과연 인간다움을 규정하는 게 무엇인지 되묻게 한다. 로이만 아니라 레이첼(숀 영)도 그렇다. 레플리컨트를 만든 기업의 회장 비서로 일하는 이 젊은 여성은 로이보다 한결 진화한 신모델 레플리컨트인데, 스스로 인간이라고 믿는다. 누군가 그 믿음을 뒤흔들려 하자, 레이첼은 어린 시절의 아주 구체적인 기억을 들려준다. 그런 기억이야말로 ‘인간’의 증명이라는 듯이.

‘블레이드 러너’의 30년 뒤를 그린 ‘블레이드 러너 2049’. [사진 소니픽쳐스엔터테인먼트코리아]

‘블레이드 러너’의 30년 뒤를 그린 ‘블레이드 러너 2049’. [사진 소니픽쳐스엔터테인먼트코리아]

철학적 질문을 함축한 이 SF 액션 영화의 배경은 머지않은 미래, 실은 2019년이다. 영화를 찍을 때는 수십 년 뒤의 미래였지만, 세월이 지나며 어느새 과거가 되어버렸다. 덕분에 영화 속 2019년과 실제 2019년이 꽤 다르단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 주변을 둘러보면 인간과 레플리컨트가 뒤섞이기는커녕 영화에서처럼 자동차가 하늘을 날아다니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그려낸 미래의 면면은 여전히 흥미롭다. 단적인 예로, 영화에 등장하는 미래형 기기들은 지금의 디지털 시대에 상상하는 것과 달리 아날로그적 느낌이 물씬하다. 미래에 대한 정교한 예언에 성공하지는 못했을망정 특정한 과거에 상상한 미래로서, 미술평론가 아서 단토가 썼던 표현을 빌리면 ‘지나간 미래’로서 충분히 눈길을 끈다.

속편 격으로 2017년 개봉한 ‘블레이드 러너 2049’ 역시 원작의 이런 특징을 일부러 살려낸다. 배경은 제목에 나오는 대로 2049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다. 한데 여기에도 이미 지나간 미래가 등장한다. 주인공 K(라이언 고슬링)가 나무 조각에서 발견한 숫자 ‘6.10.21’은 2021년 6월 10일에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는 단서가 된다. 영화 밖 현실에서는 불과 몇 주 전인데, 그즈음 실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스마트폰 등 각종 실시간 기록에 최근 기억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는 탓이다. SF영화가 상상하지 못한 미래, 하지만 디지털 시대의 현실이다. 첨언하면, 인간의 정체성과 기억에 대해서도 ‘블레이드 러너’는 얘깃거리를 여럿 던져주는 영화다.

이후남 문화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