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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전 일제가 매긴 랭킹···국보 1호 숭례문서 '1호' 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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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호 서울숭례문(남대문)의 전경. [사진 문화재청]

국보 1호 서울숭례문(남대문)의 전경. [사진 문화재청]

일제 때부터 ‘1호’로 자리매김한 국보 숭례문(남대문)의 문화재 지정번호가 사라진다. 앞으로 모든 국보‧보물‧사적‧천연기념물 등 국가지정·등록문화재가 숫자를 앞에 붙이지 않고 ‘국보 서울숭례문’ ‘보물 서울흥인지문(동대문)’ 등으로 불리게 된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과 함께 확립된 지정번호 관리체계의 전면 손질이다. 대외 문화재 행정에서 지정번호 사용을 의무화한 조항(시행령 제16조, 제21조, 제23조, 제29조 및 제34조)을 개정함에 따라서다. 문화재청은 이 같은 시행령 개정안을 29일 관보에 입법예고하고 지정번호 개정 작업에 공식 착수한다.

문화재보호법 시행령 개정안 29일 예고 #지정·등록문화재 모두 숫자 없이 표기 #행정문서부터…교과서 등에도 추후 적용

문화재청 이재원 대변인은 “기본적으로 행정업무 효율을 위해 쓰인 지정번호가 불필요한 논란을 낳고 문화재의 가치를 오해하게 한 측면이 커서 개정을 추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공문 및 각종 신청서나 공무원이 아닌 일반 국민이 사용하는 문화재 관련 서식에서 ‘지정번호 및 명칭’을 쓰는 칸에 ‘명칭’만 쓰는 식으로 바뀐다. ‘국보 1호 서울숭례문’이 아니라 ‘국보 서울숭례문’이 된다. 문화재청 정책총괄과 홍은영 사무관은 “공식 행정문서의 의무 표기가 폐기되면 향후 교과서‧안내판 등에서 지정번호를 없애는 정책이 추진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행령 개정안은 약 40일간 국민 의견 수렴 후에 법제처 심사를 거쳐 이르면 올해 안에 공포된다.

‘1호’ 숭례문 어떻게 변화했나.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1호’ 숭례문 어떻게 변화했나.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1호 숭례문’은 1934년 시작됐다. 그 전해 제정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 153건, 고적 13건, 천연기념물 3건(합계 169건)을 지정하면서 보물 제1호로 경성남대문을 지정했다. 이때 지정된 문화재는 주로 건축물 위주, 서울 4대문 중심이었다. 해방 후 문교부 문화국은 1955년 같은 법령을 원용해 국보 367건, 고적 106건, 고적 및 명승 3건, 천연기념물 116건 등 총 592건을 지정했다. 분류는 보물에서 국보로 바뀌었지만 1호는 여전히 서울남대문이었다. 1962년 문교부 문화재관리국은 문화재보호법을 공포하면서 국가지정문화재를 전면 정비했다. 주요 문화재를 국보, 보물, 사적, 사적 및 명승, 명승, 천연기념물, 중요무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등 8종으로 분류했다. 오늘날과 같은 국보 1호 서울남대문, 보물 1호 서울동대문이 마련된 때다. 공식 명칭은 1997년 각각 서울숭례문(남대문)과 서울흥인지문(동대문)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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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같은 지정번호가 문화재보호법상 일부 공문서에서만 의무표기 대상이었음에도 온 국민의 ‘금과옥조’처럼 여겨져왔단 점이다. 국검정 교과서는 물론 국립박물관 등의 각종 안내판이 문화재 이름과 지정번호를 병렬해온 관행 탓이 크다. 번호 체계가 일제 때 순서를 잇고 있는데다 문화재 가치 순위로 오해하는 세간의 인식도 문제였다. 2015년 국민인식조사 때 국보1호의 의미를 가치가 가장 높은 문화재로 인식한다는 답변이 다수였다(68.3%). 2008년 숭례문 화재 땐 이를 계기로 훈민정음(70호)을 국보1호로 재지정하자는 국민청원이 잇따르기도 했다. 문화재청은 그간 사회적 비용 및 파급효과를 감안해 보류해왔던 지정번호 개선을 올 초 역점사업으로 정하고 문화재위원회 등 전문가들의 공론화를 거쳐 구체화했다.

1904년 숭례문과 숭례문 성곽 모습. 서울숭례문(남대문)은 일제 때 조선총독부가 '보물 1호'로 지정한 이래 '1호'를 유지해왔지만 이같은 문화재 지정번호를 없애는 문화재보호법 시행령 개정안이 29일 입법예고된다. [사진 문화재청]

1904년 숭례문과 숭례문 성곽 모습. 서울숭례문(남대문)은 일제 때 조선총독부가 '보물 1호'로 지정한 이래 '1호'를 유지해왔지만 이같은 문화재 지정번호를 없애는 문화재보호법 시행령 개정안이 29일 입법예고된다. [사진 문화재청]

이번 지정번호 폐지는 국가지정‧등록문화재에 모두 적용된다. 이 가운데 별도 법률을 적용받는 국가무형문화재는 이미 지정번호 삭제를 시작했다. 지난 23일부터 시행된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개정안에 따라 무형문화재 보유자·보유단체·명예보유자·전승교육사 등을 인정할 때 정부가 발급하는 서류 등에서 지정번호 표시가 사라졌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당분간 관공서 내부적으로 쓰는 것은 불가피하겠지만 장기적으론 지정번호 자체를 폐지하고, 문화재 종류, 지정기준, 지역 등의 내용을 코드화하는 새로운 관리 체계를 마련해 갈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지정문화재는 지난 3월31일 기준 총 4153건으로 국보(349), 보물(2253), 사적(519), 명승(116), 천연기념물(464), 국가무형문화재(149), 국가민속문화재(303) 등으로 나뉜다. 구한말 이후 제작된 지 50년 이상 된 유산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등록문화재는 897건이다. 이들 지정‧등록문화재를 합치면 총 5050건이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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