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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포천 산사원 먼지 묻은 술독 사이를 걸으며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전명원의 일상의 발견(8)

아주 오래전 포천의 산사원에 갔던 적이 있다. 운전경력도 짧았고, 내비게이션도 없어 지도를 펼쳐 들고 포천의 펜션을 찾아가던 길이었다. 친구들과 함께였지만 셋 다 초행길에, 그나마 운전은 가장 길치인 나만 할 줄 알았다.

길을 잃었고, 배가 고파 밥이나 먼저 먹자고 식당을 찾던 눈에 우연히 산사원 표지판이 들어왔다. 이왕 길을 잃은 거 저기나 들어가 보자. 셋이 대책 없이 그렇게 들어갔다. 넓은 정원이 볼만했는데 길을 잃은 우리는 마음도 급해 대충 둘러보고 나오며 다음을 기약했다. “다음에 다시 오면 정원도 꼭 보자” 했다.

그 '다음'이 참 길었다. 그 이후 친구들과 만나면 가끔 그때의 포천여행을 떠올리곤 했다. 길을 잃어 구리부터 헤매던 일. 이왕 늦은 거 밥이나 먹자고 김치말이 국수를 사 먹었던 일. 그리고 우연히 산사원에 들어가 시중에선 팔지 않는 생주를 몇 병 사 들고 신이 났던 우리의 옛 추억이 거기 있었다.

포천 산사원 전경. [사진 전명원]

포천 산사원 전경. [사진 전명원]

아이들이 모두 어릴 때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을 용감하게 떼어놓고 셋이 떠난 그 짧은 여행은, 우리를 초등학교쯤의 여자아이로 만들었다. 생각 없이 떠들고, 대책 없이 웃었다. “그래서 너무나 즐거웠었지”라고 두고두고 우리 셋은 추억했다. 그 이후에도 종종 만났지만 점차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사정으로, 서로 다른 인생을 살기 바빴다. 그마저도 자주 보기 힘든 시간을 지나고 보니, 우리가 지나온 세월만큼 다들 멀리 있는 듯하다.

그 시절의 산사원을 기억하는데 크게 변한 것은 없어 보였다. 친구들과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이번에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돌아보았다. 입장료 4000원에 술에 관한 많은 것이 있는 전시실도 볼 수 있었고, 우곡 배상면 선생의 기록도 접할 수 있다. 그리고 20여 종의 술을 자유로이 시음도 할 수 있었다. 시중에서는 보기 힘든 종류가 여럿이라 꽤 흥미롭다. 술을 사랑하고, 술에 관심 있는 사람은 참 좋아할 만한 공간이다.

배상면 선생이 술을 제조하기 위해 쓰던 도구들. [사진 전명원]

배상면 선생이 술을 제조하기 위해 쓰던 도구들. [사진 전명원]

우곡 배상면 선생의 기록실을 둘러보았다. 누룩 왕으로 불릴 정도였던 그분은 일생을 술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연대기를 눈으로 훑었다. 내가 태어난 해에, 그런 치열한 삶의 한가운데를 통과해 살던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문득,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백번을 시도하고 천 번을 고치라’ 했다는 말을 늘 남겼다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글을 쓰다 보니 처음엔 그저 쓰는 것에만 열심이었다. 이제야 고치는데 좀 더 공을 들여야 한다는 말의 뜻을 알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그 글귀는 깊이 남았다. 살아보면 글뿐일 리가 없다. 그 어떤 일이든 끊임없이 시도하고, 끊임없이 개선해야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산사원의 넓은 정원 한편에 사람도 들어갈 만한 큼 큰 독이 줄지어 서 있다. 발효를 위해 독 표면의 먼지를 일부러 닦지 않는다고 한다.사진 전명원]

산사원의 넓은 정원 한편에 사람도 들어갈 만한 큼 큰 독이 줄지어 서 있다. 발효를 위해 독 표면의 먼지를 일부러 닦지 않는다고 한다.사진 전명원]

예전에 제대로 보지 못한 정원엔 햇살이 눈 부셨다. 넓디넓은 정원 한편에 사람도 들어갈 만큼 큰 독이 엄청 많았다. 줄지어 선 술독들 사이를 걸었다. 발효를 위해 독 표면의 먼지를 일부러 닦지 않는다고 했다. 어쩌면 닦아내지 못한 마음의 먼지도 그처럼 다 나쁜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때로 그 먼지 밑에서 술이 익어 어느 날 향긋한 한잔으로 내놓을 수 있다면 좋겠다. 누군가의 볼을 발그레 물들이고, 어색한 순간은 전등을 켠 듯 밝아지고, 슬픔은 잠시 저만치 밀어둘 수 있는 술 한잔으로 말이다.

술독 사이를 걸었다. 햇살이 눈부셨다. 잔디가 푸르렀다. 문득, 친구들에게 안부를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잘 지내고 있어? 다음엔, 우리 다 같이 오자.”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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