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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스페인 여자의 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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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스페인 여자의 딸

스페인 여자의 딸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앞으로 나아갔다. … 수하물 찾는 곳에 다다르자, 컨베이어 벨트가 여행 가방들을 뱉어내고 있었다. 형광등이 비추는 대기실은 내 안에 자리를 잡은 여자가 멋대로 자라나는 인큐베이터처럼 보였다. 나는 나의 어머니이자 자식이었다. … 그날, 나는 출산했다. 이를 악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를 낳았다. 마지막 힘주기는 내 여행 가방이었다. 나는 가방 손잡이를 잡고 출구를 향해 나아갔다. “X같은 나라, 다시는 나를 못 볼 거다.”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스페인 여자의 딸』

“출구가 없던 그 도시에서, 우리는 죽을 자리를 두고 싸웠다.” 좌파 무상 포퓰리즘과 장기 독재로 경제와 민주주의가 파탄 나고 국민들의 엑소더스까지 벌어진 베네수엘라의 혼란상을 그려, 세계의 주목을 받은 소설이다. 주인공은 폭력이 일상이 된 무정부 상태의 도시에서 홀로 싸우다 베네수엘라를 탈출한다.

베네수엘라 기자 출신인 작가는 “베네수엘라 같은 사회에서 유일하게 민주주의적인 것은 배고픔과 죽음이었다”고 회상한다.  “생명이, 돈이, 기력이 우리 손을 떠나갔다. 심지어 하루도 짧아졌다. 오후 6시에 길에 있다는 건 명줄을 시험해 보는 짓이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죽을 수 있었다. 총상 납치 강도.” “내 뒤로 줄 선 사람, 나보다 더 가진 사람은 언제나 잠재적인 적이었다.” “압수당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여자들과 노인들, 위협하기 쉬운 조건을 갖춘 목표물이었다.” 지옥도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