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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 위주 법에 예방은 뒷전…바지사장 앉히고 면피용 지시 남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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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산업안전 패러다임 바꾸자 

김범석 쿠팡 창업자는 지난달 말 한국 쿠팡의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이 소식이 전해진 날, 공교롭게 쿠팡 물류센터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의장 사임을 놓고 해석이 분분했다. 이번 화재가 중대재해처벌법 대상은 아니지만 법이 발효됐다면 회사 대표로서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추측성 논란 때문이다. 쿠팡 측은 “김 의장이 미국 상장법인인 쿠팡 아이엔씨의 최고경영자(CEO)와 이사회 의장직을 겸하고 있다. 글로벌 경영에 집중하기 위해 한국 쿠팡의 직을 내려놨다”고 해명했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김씨는 의장에서 물러남으로써 중대재해 처벌 대상에서 제외되는 건 사실이다.

중소기업들 ‘대표 돌려막기’ 확산 #바지사장은 안전 잘 몰라 사각지대화 #전문가들, 정부의 감독 방식도 비판 #“본사 서류만 뒤지는 건 쇼윈도 행정” #처벌 피하려는 기류에 로펌만 살찌워

중대재해처벌법이 발효(내년 1월)되면 회사 대표가 재해 책임을 져야 한다. 김 의장이야 한국 쿠팡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면 그만이다. 중대재해가 발생해도 처벌 부담을 덜고, 한국 쿠팡의 경영 공백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처벌 위주의 산업안전법 나올 때마다 안전사고 더 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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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은 다르다. 울산의 대기업 협력업체 관계자는 최근 정부 당국자에게  “처벌 확률이 높든 낮든 상관없이, 수사 대상에 오르면 작은 기업은 그 순간 망한다”고 하소연했다. 은행이 대출을 조이거나 회수하고, 뒤이어 채권자들이 들이닥치고, 원청에서 거래를 끊는 수순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을 덧붙여서다.

그렇다면 대책을 수립하느라 분주해야 한다. 한데 산업현장에선 엉뚱한 기류가 감지된다. 모 조선 협력업체 사장은 얼마 전 회장으로 물러앉고 사장을 외부에서 초빙했다고 한다. “단지 사고 이후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최소한 폐업은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 회사가 문을 닫으면 근로자도 일자리를 잃는다”는 이유를 댔다. 대표직 돌려막기가 중대재해처벌법 대응책으로 둔갑해 중소기업에 번지고 있다. 이른바 ‘바지사장’이다. 또 다른 회사 관계자는 “찍힐까 봐 바지사장 둔 걸 함구한다”며 “이런 현실을 정부만 모른다. 우린 부글부글 끓는다”고 말했다.

이정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중소기업은 재정이나 인력이 부족한 데다 가혹한 처벌에 노출돼 존립 자체를 위협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 사내 협력회사 협의공조회 양충생 회장은 “사고 원인 파악이나 정상 참작 없이 ‘노동자가 죽으면 대표를 잡아갑니다’라며 무작정 책임을 묻는 건 불합리하다”며 “대신 책임질 바지사장이라도 앉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는 건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작은 사업장 사고사망 더 많은데 관리는 사각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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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바지사장은 산업현장을 안전 사각지대로 만들 공산이 크다. 박두용 산업안전공단 이사장은 “바지사장은 안전 관련 지식이 없다”며 “법의 반작용으로 안전 문제를 방관하는 책임자(바지사장)가 생긴다면 더 큰 부작용을 낳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건설업계의 난맥상은 더 심하다. 법을 지키기 위한 것인지 법망을 피하기 위한 것인지 헛갈릴 정도다. 여기에 정부의 감독력이 집중 투입되면서 이에 대응하느라 정작 건설현장은 안전 사각지대화하고 있다. 최근 고용노동부는 태영건설 본사에 대한 특별감독을 시작으로 현대, 대우건설 등 대형 건설사로 특별감독을 확대하고 있다. 본사의 안전관리체계를 점검하고, 문제점을 파악해 개선하겠다는 의도다. 문제는 현장 관리 대신 특별감독이란 이름으로 대대적으로 본사를 감독하는 데 따른 부작용이다. 모 건설사 관계자는 “각 지역 현장의 유능한 안전관리자를 모두 본사로 소집했다”며 “특별감독기간 동안 현장은 관리 사각지대화, 부실화하지만 정부의 감독에 대응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회사 관계자는 “사고만 났다 하면 보여주기식 특별감독이 나온다. 사고와 관련 없는 오만가지를 다 뒤진다. 제출할 서류도 많고, 그것에 대응하다 보면 정작 현장은 마비된다”고 말했다. 특별감독이 현장 관리보다는 본사에 들이닥쳐 서류 점검 형식으로 진행되는 데 따른 허점이다.

건설사의 안전대책도 정부의 특별감독 관행을 좇아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역시 서류 중심이다. 최근 들어 건설사는 너나 할 것 없이 전국 각 현장에 수시로 대표이사 명의의 지시를 내려보낸다. ‘폭염에 대비하라’ ‘안전모 착용을 확인하라’와 같은 것들이다. 본사가 굳이 이런 지시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현장에선 이런 지시가 내려왔다는 사실을 문서로 남기고, 일일이 게시하는 한편 그 결과를 본사에 보고한다. 이런 서류 작업에 매달리다 보면 현장을 놓칠 수밖에 없다. 회사도 안다. 그런데도 갑자기 문서 지시를 늘리는 이유가 뭘까. “근거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라고 한다. 정부의 감독이 서류 점검으로 따지니 생기는 부작용이다. 심지어 컨설팅 업체들도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대책 의뢰가 오면 “근거를 남겨라. 소송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조언하는 판이다.

처벌에 초점을 맞춰 산업안전 문제를 다루다 보니 법무법인만 살찌운다는 비판도 나온다. 법무법인 율촌은 최근 ‘중대재해센터’를 발족했다. 올 초까지 고용부 산재예방보상정책국장을 역임했던 박영만 변호사까지 가세해 30명 정도로 꾸려졌다. 국내 대형 로펌치고 산재팀을 꾸리지 않은 곳이 없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된 뒤 산업안전이 로펌 입장에선 돈이 되는 분야라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각 기업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로펌을 찾는 목적은 딱 하나다. 처벌을 면하기 위해서다. 산업안전이 예방보다 면피로 흐르고 있는 셈이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 교수는 “산재 사망사고의 대부분이 소규모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점을 고려하면 본사에서 서류를 뒤지는 형태의 감독은 쇼윈도 행정에 불과하다”며 “이런 지시·명령 위주의 행정 대신 컨설팅을 확대하고 정부 부처 간 협업과 민간과의 역할 분담 등을 통한 현장 예방 행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한은화·강기헌 기자

울산=백경서 기자, 여수=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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