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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수염이 세균 아지트""경옥고가 독약"…누가 정조 죽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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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지은 약인가?" (정조)
"강최현이 지은 것인데 여러 사람의 의논이 대체로 서로 비슷하였습니다." (이시수)
"5돈쭝인가?" (정조)
"인삼 3돈을 넣었습니다." (이시수)

[다시보는 개혁군주 정조①] #종기 앓은지 보름만에 급사 #독살설 등 음모론 떠돌아 #이상곤 "인삼 과다 처방이 문제" #임재현 "콧수염 속 세균이 원인"

정조가 사망한 1800년(정조 24년) 6월 28일 『정조실록』 에 나오는 정조와 우의정 이시수의 대화 내용이다. 실록에 기록된 정조의 마지막 육성이기도 하다.
6월 14일 종기가 낫지 않아 의관의 진찰을 받은 정조는 2주 동안 각종 처방을 이어가다가 221년 전 6월 28일 만 4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조선의 평균 수명을 감안하더라도 아쉬운 나이였다. 그의 할아버지 영조가 82세로 장수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정조가 공식적으로 남긴 마지막 말이 "(인삼) 5돈쭝인가?"라는 것은 그의 급작스러운 최후를 보여주는 듯 하다.

조선의 22대 국왕 정조. 사진은 이길범 화백이 1989년 제작한 정조의 표준 영정 [사진 판미동]

조선의 22대 국왕 정조. 사진은 이길범 화백이 1989년 제작한 정조의 표준 영정 [사진 판미동]

갑작스런 죽음은 독살설로 이어졌다. 현대에 들어 소설 『영원한 제국』을 비롯한 많은 창작물과 학술서 등에서 이를 다뤘다. 그러면서 일각에선 정조와 정치적 대립 관계에 있었던 노론 벽파를 배후로 지목했다. 또 정조가 임종할 때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대왕대비 정순왕후(영조의 두 번째 부인)가 옆에 있었다는 점도 이러한 추측에 힘을 실었다.
정조는 정말로 누군가에 의해 독살당한 것일까. 우선 의료 전문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들어봤다. 조선 국왕들의 각종 증상과 처방을 분석한『왕의 한의학』저자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과 사극에 등장하는 질병을 현대 의학으로 풀어보는 글을 언론 등에 연재했던 임재현 나누리병원 원장이다.

정조의 15일.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정조의 15일.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①콧수염 때문에 죽었다?
임재현 나누리병원 원장은 등에 난 종기(등창)를 1차 원인으로 꼽았다. 임 원장은 "요즘은 종기가 악화하여 사망했다고 한다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위생이 열악했던 조선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며 "왕의 신체라고 해서 지금처럼 칼을 이용해 종기를 짜내지 못했기 때문에 조직의 괴사가 일어나고 균이 몸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패혈증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등창의 원인 중 하나로 특히 콧수염을 지목했다.
임 원장은 "종기를 일으킨 원인은 황색포도상 구균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이 모여있는 곳이 바로 콧속이다. 조선시대 왕이 위엄있게 기른 콧수염이 바로 콧구멍에서 내려온 황색포도상 구균의 아지트였을 것이고 이를 제때 처리하지 못해 패혈증까지 이어진 것 같다. 만약 정조가 콧수염을 깎고 콧구멍 내 코털도 깨끗이 정리했다면 미리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독살 가능성에 대해선 "효과적인 외과 시술을 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던 것일 뿐 의도적인 독살 등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의문을 표했다.

②인삼 복용이 '악수'?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은 '의도치 않은 의료사고'라고 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정조에게 맞지 않은 처방을 쓴 것이 문제였다는 것이다. 이상곤 원장은 2014년 펴낸 『왕의 한의학』을 통해 조선 국왕들의 질병과 처방 등을 분석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정조에게 '독약'이 된 것은 인삼이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만병통치약'처럼 여겨지며 조선의 값비싼 수출상품이기도 했던 인삼이 문제라니 무슨 말일까?

인삼 [사진 진안군청]

인삼 [사진 진안군청]

이 원장은 "정조는 인삼을 꺼렸다. 몸에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삼이 들어간 육화탕(六和湯)이나 경옥고(瓊玉膏)를 꺼렸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6월 23일 어의 강명길 등이 원기를 보강하기 위해 경옥고 복용을 권하자 정조는 "열을 다스리는 약을 크게 유의해야 한다"며 이를 만류했다. 이틀 뒤에도 갈증을 없애고 맥을 살리는 생맥산이라는 약을 권하자 인삼 1돈이 들어있다며 거절했고, 6월 26일에도 경옥고를 다시 권유받자 "경들은 나의 본디 체질을 몰라서 그렇다. 나는 본디 온제(溫劑)를 복용하지 못하는데 음산하고 궂은 날에는 더욱 먹지 못하니 그 해로움이 틀림없이 일어난다…평소 경옥고를 한 번 맛보면 5~6일 동안 음식을 먹지 못했다"고 답했다.
하지만 신하들의 강권이 이어지자 경옥고를 귤강차에 타서 복용했는데 결국 문제가 발생했다. 그날 밤새 잠을 자지 못하고 정신이 몽롱해지는 등 상태가 악화했고 이틀 뒤 사망했다.

동명 소설을 원작 삼은 영화 '영원한 제국' (1995)의 정조(안성기) [중앙포토]

동명 소설을 원작 삼은 영화 '영원한 제국' (1995)의 정조(안성기) [중앙포토]

이 원장은 정조의 죽음을 앞당긴 것은 인삼 위주의 경옥고 처방이라고 봤다. 그는 "인삼은 명약이지만 맞지 않는 사람에겐 오히려 독이 된다"며 "특히 정조처럼 심장의 울화 때문에 종기가 생기고, 그것도 가장 열이 많은 머리 부분에 생겼다면 더욱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인삼은 왜 정조와 상극이었을까.
이 원장에 의하면 정조의 질병은 울화 때문이다. 『동의보감』은 종기를 옹저(癰疽)라면서 원인을 화(火)라고 정의한다. 억울한 일을 당해 마음이 상하거나 소갈병이 오래되면 생기는 병으로 기록됐다. 이 원장은 "정조는 어린 시절 겪은 부친 사도세자의 죽음이 트라우마가 됐고, 마음속 불길에 평생 갉아 먹히며 살았다"고 말했다.
의학에 조예가 깊었던 정조도 이를 알았다. 그는 건강이 악화했을 때 "울화가 팽배해 있는 결과로서 나의 학문의 힘이 깊지 못해 의지의 힘이 혈기를 제어하지 못한다"라고도 말했고 어의 강명길의 처방에 따라 고암심신환을 20세 후반부터 10여년 복용하기도 했다. 고암심신환은 열이 많은 사람의 화증을 치료하는 약이다.

동의보감 초간본 사진=대한한의사협회

동의보감 초간본 사진=대한한의사협회

이 원장도 일각에서 제기하는 독살설에 대해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당시 어의였던 강명관은 정조가 매우 신임한 사람이었고, 강명관 뿐 아니라 많은 의원과 측근 대신들이 내내 함께했는데 특정인이 독살을 손 쓸 틈은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조가 그렇게 꺼린 인삼 처방은 어떨까. 이에 대해서도 이 원장은 "정조의 기력이 워낙 떨어져 있다 보니 당시 의학적 지식으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며 "인삼 함유량을 줄이는 등 나름 고심한 처방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수은 중독은 글쎄…
일각에서는 정조의 상태를 호전하기 위해 조치한 '연훈방' 처방이 '악수'가 되었을 것이란 추정도 있다. 연훈방(烟熏方)은 염증과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수은이 들어간 약재를 태워 그 연기를 환부에 쏘이는 한방 치료법이다.
정조에게 연훈방을 처음 쓴 것은 죽기 나흘 전인 1800년 6월 24일. 종기 통증을 누르는데 효험을 보지 못하자 사용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두 전문가의 의견이 미세하게 엇갈렸지만, 급사의 원인은 아닐 것이라고 봤다.

수은

수은

이 원장은 "수인방을 만든 심인이라는 인물이 노론 벽파의 거두인 심환지의 먼 친척이라서 예전부터 '독살설'의 소재가 됐다"면서 "하지만 연훈방은 한 차례 사용했을 뿐이고 어느 정도 효험을 본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연훈방을 다시 써보자고 한 것도 정조였다"며 일축했다.
반면 임 원장은 "수은을 연기를 통해 몸에 쏘였다는 것은 가스실에 집어넣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어떤 식으로든 정조의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면서도 "그것 때문에 갑자기 사망했다고까지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대중에게 '정조 독살설'은 흡입력이 강하다. 거기엔 한창 나이에 급사한 '개혁군주'에 대한 아쉬움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정조가 사망한 뒤 조선은 60여년간 세도정치라는 퇴행적 정치로 접어들었고, 이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는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박현모 여주대 교수는 "애민(愛民)군주, 개혁을 추진한 그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일종의 확신 같은 믿음이 대중에 널리 퍼져있다"며 "그것이 한편으로는 정조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음모가 작용했을 것이라는 심리로 이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유봉학 한신대 명예교수는 “정조 독살의 증거라고 하는 대부분의 자료는 사료의 전후 맥락을 거두절미하고 그럴듯하게 짜깁기 한 것에 불과하다"며 “정조를 독살한 노론의 후예들이 세도정치를 하고 조선은 나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설명은 역사적 사실과도 다르고, 일본에 의한 국권 침탈을 옹호해주는 논리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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