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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기재부 ‘단순 실수’에 천당ㆍ지옥 오간 공기업

중앙일보

입력

안도걸 기획재정부 2차관(가운데)을 비롯한 기재부 간부가 2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2020년 공공기관 경영평가' 결과를 수정 발표하며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안도걸 기획재정부 2차관(가운데)을 비롯한 기재부 간부가 2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2020년 공공기관 경영평가' 결과를 수정 발표하며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의 직장’으로 불리는 공기업조차 기획재정부 눈치를 본다. 기재부는 매년 공기업 경영 성과를 평가해 부진한 회사의 경비를 깎고, 성과급을 차등 지급한다. 기관장의 해임을 건의하기도 한다. 지난해 D등급(미흡)을 받은 한국과학창의재단의 경우 올해 평가에서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기재부로부터 지난 18일 C등급(보통)으로 전년보다 한 단계 오른 평가를 받았는데, 일주일 만에 D등급으로 하향 조정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기재부가 설명한 이유는? “계산 실수”였다.

기재부는 지난 25일 공공기관 운영위원회를 열어 ‘2020년도 공공기관 경영평가’ 결과에서 나온 오류를 수정하고 향후 조치 계획을 심의ㆍ의결했다고 밝혔다. 평가 대상 공공기관 131곳 중 102곳의 경영 평가에서 오류가 나와 10곳은 종합 등급을, 13곳은 성과급 산정 관련 등급을 바로잡았다는 내용이다.

공공기관 경영평가를 도입한 1983년 이래 계산을 잘못해 평가 종합 등급을 대대적으로 번복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2017ㆍ2018년에도 오류가 있었지만, 각각 1건에 불과했고 종합 등급도 그대로였다. 평가 등급이 바뀐 한 공공기관 관계자는 “칼자루를 쥔 기재부 눈치가 보여 드러내 말은 못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정부 평가를 믿을 수 있겠느냐”고 꼬집었다.

공공기관 경영평가는 민간 상장사보다 외부 감시가 소홀한 공공기관을 견제하는 수단이다. 특히 올해는 임직원의 부동산 투기 논란을 일으킨 한국토지주택공사(LH), 기관장의 폭언 논란이 불거진 한국마사회를 비롯해 공기업 전반에 대한 국민 불신이 높았다. 어느 때보다 공정한 평가를 기대했지만, 무더기 오류로 신뢰를 갉아먹었다.

문제를 밝혀낸 과정이 더 문제였다. 기재부 스스로 오류를 파악한 게 아니라서다. 지난 18일 첫 발표에서 지나치게 낮은 점수와 등급을 받은 일부 공공기관이 이의를 제기했고, 기재부가 다시 검증하는 과정에서 잘못이 드러났다. 만약 잘못된 평가 결과에 따라 기관장이 해임되고, 성과급이 뒤죽박죽으로 지급됐다면 후폭풍이 더 거셌을 것이다.

무엇보다 사후 조치가 ‘꼬리 자르기’ 수준이라 실망스럽다. 기재부는 25일 브리핑에서 “공공기관 평가는 공정성과 독립성을 위해 기재부가 직접 하지 않고 민간 평가단에 일임한다” “평가 오류 책임이 있는 평가단 관계자를 해촉하고 향후 위촉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인사 조처를 했다”는 식의 답으로 일관했다. 외부 평가단이 만든 결과라 오류를 미리 파악하지 못했다는 식의 ‘책임 떠넘기기’로 비쳤다.

평가를 외부에 맡겼다고 해서 결과에 따른 책임까지 위임한 건 아니다. 평가 과정을 총괄하고 결과를 최종 검증할 책임은 정부에 있다. 기재부는 예산과 세제 등 국민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숫자’를 다루는 부처다. 단순한 계산 실수란 정부 해명이 ‘실수니까 괜찮아’란 뜻은 아니었길 바란다.

김기환 경제정책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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