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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한은이 北에 뺏긴 금괴, 대구 동화사 뒤뜰에 묻혔다? [박용한 배틀그라운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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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 인민군 앞에 피란을 떠나기 바빴다. 한국은행 지하 금고에 보관하던 금 1.3tㆍ은 18.5tㆍ화폐 40억원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1129일 동안 계속됐던 전쟁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꽤 많다.

북한 인민군 한국은행 금고 들어가 #미국 ‘승산 없다’ 한반도 철수 준비 #마오쩌둥 맏아들 미군 폭격에 전사 #아이젠하워 “내 아들 후방으로 빼라”

그해 여름 인민군이 서울에 들이닥치는 건 시간문제였다.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운 기습 남침을 막아내는 게 버겁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38선에서 서울까지 거리는 불과 50㎞, 너무 가까웠다.

한국은행 금괴 수송에는 미군 GMC 트럭이 투입됐다. 2차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까지 쓰였던 대표적인 군용 차량이다. 6ㆍ25 전쟁 당시 한국군도 운용했다. 2차세계대전 당시 작전 중인 차량. 중앙포토

한국은행 금괴 수송에는 미군 GMC 트럭이 투입됐다. 2차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까지 쓰였던 대표적인 군용 차량이다. 6ㆍ25 전쟁 당시 한국군도 운용했다. 2차세계대전 당시 작전 중인 차량. 중앙포토

개전 이틀만인 27일 새벽 2시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서울에서 황급히 빠져나갔다. 이어 새벽 4시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는 수도를 수원으로 옮긴다고 의결했다.

한국은행도 금괴를 당장 후방으로 옮겨야 할 상황인데 방법이 없었다. 이미 모든 차량은 징발돼 이동 수단이 없어 은밀하고 신속한 수송이 불가능했다.

서울에 진입한 북한 인민군 [중앙포토]

서울에 진입한 북한 인민군 [중앙포토]

결국 군에서 나섰다.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송요찬 헌병사령관에게 수송 작전을 지시했다. 27일 오후 2시 현금과 금·은괴 등 약 4t 분량을 89개 상자에 포장해 군 트럭 2대에 실어 대전 임시청사로 출발했다. 헌병 1개 소대가 호위를 맡았다.

정부는 28일 새벽 2시 30분경 한강철교와 인도교를 폭파했다. 금괴는 이날 오후 2시 대전역에서 피란민 열차로 위장한 뒤 다음날 오후 4시 진해 해군통제사령부에 무사히 도착했다. 금괴 수송 작전은 이처럼 극적으로 이뤄졌다.

열차에 올라 후방으로 떠나는 피란민 [중앙포토]

열차에 올라 후방으로 떠나는 피란민 [중앙포토]

하지만 인민군은 벌써 27일 저녁 서울 외곽에 도착했고 다음 날 새벽 서울 시내로 전차가 진입했다. 금고에 보관하던 모든 재산을 꺼내지 못한 상황에서다. 한국은행에 남아 있던 금괴 0.2t과 은 16t은 그렇게 빼앗겼다.

인민군은 7월 20일 대전마저 점령하고 이내 대구를 지나려 낙동강으로 향했다. 이대로 전쟁이 끝날 위기다. 이에 정부는 금괴를 8월 1일 진해에서 부산으로 옮긴 뒤 미국 연방준비은행으로 보내 기탁했다.

‘보물찾기’ 사라진 금괴가 사찰 뒤뜰에?

북한이 빼앗은 금괴는 어디로 갔을까. 2008년 탈북해 한국에 정착한 김 모 씨가 2011년 12월 대구 팔공산에 위치한 동화사 대웅전(보물 제1563호) 뒤뜰에 묻힌 금괴 40㎏을 꺼내겠다고 나섰다.

그는 전쟁 당시 양아버지가 피란 중 이곳에 금괴를 숨겨 둔 뒤 북한으로 올라왔다고 주장했다. 문화재청은 조건부 발굴 허가를 냈다. 하지만 동화사는 명확한 근거와 책임을 요구했다.

대구 팔공산에 위치한 동화사 대웅전 뒤뜰 [중앙포토]

대구 팔공산에 위치한 동화사 대웅전 뒤뜰 [중앙포토]

한국은행은 “발굴할 때 참관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국가정보원과 경찰도 발굴 논의에 합류했다. 탈북자 사회에선 인민군이던 김 씨의 양아버지가 한국은행에 남겨진 금괴를 옮기던 중 빼돌려 숨겼다는 주장도 나왔다.

주장이 엇갈리면서 발굴 허가는 취소됐다. 하지만 뒤뜰 콘크리트 바닥 1.2m 아래에 금괴가 묻혀있다는 ‘보물찾기’ 소문은 여전하다. 대웅전 주변은 폐쇄회로(CCTV) 감시 장치가 24시간 지켜보고 있다.

한반도 탈출 망명정부 비밀 계획

이처럼 금괴를 미국으로 보낼 정도로 급박했다. 이때 은밀하게 망명 정부 설치 논의도 나왔다. 미국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논의하던 인천상륙작전도 실패 가능성을 더 크게 봤다.

6·25 전쟁 직후 포로교환 모습으로 1953년 포로교환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앞줄 가운데)과 밴플리트 장군(앞줄 왼쪽)의 모습. [육군 제공]

6·25 전쟁 직후 포로교환 모습으로 1953년 포로교환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앞줄 가운데)과 밴플리트 장군(앞줄 왼쪽)의 모습. [육군 제공]

미국은 9월 인민군이 영천까지 내려오자 ‘New Korea’ 계획을 검토했다. 한국 정부 요인과 군대 등 62만명을 한반도에서 탈출시켜 미국령 사모아 제도에 재배치한다는 계획이다. 한국의 반발을 우려해 비밀로 은밀하게 구상했다.

9월 8일 이 대통령은 미 정부의 철수 계획을 처음 알게 됐고 크게 격노했다. 전쟁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미국에 전달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1597년 명랑해전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이 했던 말이다. 인민군을 상대로 죽기로 싸웠던 때문일까. 마침 영천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철수 계획은 없던 일이 됐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 도심에서 저항하던 북한 인민군을 생포한 모습. 사진 Wikipedia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 도심에서 저항하던 북한 인민군을 생포한 모습. 사진 Wikipedia

김일성은 훗날 영천에서의 패배가 전쟁의 승패를 바꿨다며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개전 석 달 만에 부산을 점령하고 전쟁을 끝내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과 중공군이 본격으로 참전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미ㆍ중 국가원수 아들, 6ㆍ25전쟁 참전

6ㆍ25 전쟁에는 중국 국가 주석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과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도 참전했다. 하지만 두 아들의 운명은 같은 듯하면서도 다소 달랐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마오쩌둥은 “내 아들을 보내지 않으면 누가 전쟁터에 간단 말이냐”며 맏아들을 전장으로 보냈다. 마오안잉은 후방지역에 배치됐지만, 참전 한 달여 만인 11월 25일 평안북도에서 미 공군 B-26 폭격기 네이팜탄 공격에 전사했다.

지난 2018년 7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정전협정 체결 65주년을 맞아 6·25 전쟁 중 전사한 마오쩌둥 장남 마오안잉 묘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지난 2018년 7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정전협정 체결 65주년을 맞아 6·25 전쟁 중 전사한 마오쩌둥 장남 마오안잉 묘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마오쩌둥은 이듬해 1월에서야 사망 소식을 알게 됐다. 그 누구도 “잘 있냐”며 마오쩌둥이 먼저 묻기 전에 맏아들이 죽었다는 보고를 못 했다.

마오쩌둥은 며느리 부탁에도 불구하고 “특별대우를 할 수 없다”며 시신을 북한에 남겨두기로 했다. 마모안잉 유해는 지금도 다른 중공군 전사자와 함께 평안북도 회창군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부 열사릉원에 묻혀있다.

마오 “특별대우 없다”, 아이젠하워 “후방으로 빼라”

마오인잉이 전사한 지 2년 뒤, 1952년 12월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가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현장 시찰에서 “내 둘째 아들을 후방으로 빼달라”고 요구했다.

1952년 12월 4일 서울 근교에서 전투 중인 제3보병사단 15연대 사병들과 식사 중인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인(맨 왼쪽). 사진 아이젠하워기념관

1952년 12월 4일 서울 근교에서 전투 중인 제3보병사단 15연대 사병들과 식사 중인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인(맨 왼쪽). 사진 아이젠하워기념관

아이젠하워는 막역한 후배인 제임스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에서 “내 아들 존, 지금 어디에 있냐?”며 물었고, 밴 플리트는 “존 소령은 3사단 예하 대대장으로 중부전선 최전선에서 있다”고 답했다.

이때 아이젠하워가 후방으로 재배치해달라는 부탁을 꺼냈다. 아이젠하워의 첫째 아들은 어려서 사망했기에 존 소령은 사실상 외아들이다. 그런데도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하는 벤 플리트 사령관 입장에선 난처한 요구다.

1951년 6ㆍ25전쟁에 투입된 미 공군 B-26C 폭격기. 사진 미 공군

1951년 6ㆍ25전쟁에 투입된 미 공군 B-26C 폭격기. 사진 미 공군

게다가 밴 플리트의 외아들 제임스 밴 플리트 주니어는 앞서 그해 4월 4일 B-26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 중 북한 순천 지역에서 실종됐다. 3월 14일 한국에 도착한 뒤 겨우 보름 만이다. 그는 2년 뒤 전사자로 처리됐다.

아이젠하워는 “아들이 전사한다면 나는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이겠다”면서도 “대통령의 자식이 포로가 돼 작전에 차질을 주는 일이 없도록 최소한의 예방 조치만 요청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952년 북한 지역을 폭격하는 미 공군 B-26 폭격기. 사진 미 공군

1952년 북한 지역을 폭격하는 미 공군 B-26 폭격기. 사진 미 공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는 한 수 앞을 내다본 것이다. 존 소령은 후방 정보처로 이동했고 전쟁 뒤 준장으로 군 생활을 마쳤다. 이후 벨기에 주재 미 대사를 지냈다.

최근 중국에선 마모안잉을 두고 논란이 뜨겁다. 그는 계란볶음밥을 만들다 폭격을 당해 최후를 맞았다고 알려져 있다. 미군 공습을 피해 방공호에 숨어있다 뒤늦게 밖으로 나와 아침을 준비하던 순간이다.

올해 공산당 창당 100주년 앞둔 중국 정부는 이게 못마땅한 것 같다. 방공호 안에서 작전 중 전사했다는 주장을 새로 꺼내며 ‘역사 재포장’에 나섰다. 전쟁 영웅으로 칭송하는 중국 국부의 아들이 밥 먹다 미군 공습에 전사한 게 창피하다는 얘기다. 중국은 무엇이 부끄러운 것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박용한 기자 park.yong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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