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인사이드]6·25전쟁 앞두고 국군 병력 대폭 줄어…내부 침투 간첩있었나

중앙일보

입력 2021.06.26 07:00

업데이트 2021.07.02 10:46

국군의 비상경계령이 해제되고 많은 병력이 병영 밖으로 나간 상태에서 기습을 가한 북한군은 손쉽게 서울을 점령했다. 중앙포토

국군의 비상경계령이 해제되고 많은 병력이 병영 밖으로 나간 상태에서 기습을 가한 북한군은 손쉽게 서울을 점령했다. 중앙포토

1950년 4월이 되자 38선 일대의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전면전까지는 아니어도 북한의 도발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육군본부는 29일에 비상경계령을 발령했고 5월 3일까지 전투태세를 유지했다.

개전 앞두고 경계령 발령 반복돼
전쟁 징후 감지하고도 휴가 보내
'호구지책' 먹는 문제 해결 못해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북한군의 기습을 받고 6·25전쟁이 발발한 것으로 아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사실 심상치 않은 징후를 감지하고는 있었다. 이후에도 긴장된 상황은 여전했기에 경계령을 발동하고 해제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리고 12일간 이어진 네 번째 경계령이 6월 24일 0시를 기해 해제된 지 불과 하루 만에 북한의 남침이 시작됐다. 더구나 이때의 조치가 이전과 달랐던 것은 장병들의 휴가·외출·외박이 대거 허용됐다는 점이다.

즉 가장 경계 태세가 약화 된 틈을 타서 북한군의 공격이 개시된 것이었고 당연히 이는 초반 판세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우연이라 하기에는 북한의 침공 일시가 너무나 적절했다.

그래서 군 지휘부에 북한군 침공에 동조하는 제5열이 침투해 공작을 벌인 것이 아니냐는 미스터리가 오랫동안 제기돼 왔다. 하지만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겼을 정도로 심하게 밀렸기에 그런 이야기나 나오는 것이지 의혹을 일반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전쟁 발발 직후에 미 군사고문단장 제임스 하우스먼 대위와 함께 전방을 방문한 총참모장 채병덕. 개전 당일인 6월 25일 오전 의정부 부근으로 추정된다. 중앙포토

전쟁 발발 직후에 미 군사고문단장 제임스 하우스먼 대위와 함께 전방을 방문한 총참모장 채병덕. 개전 당일인 6월 25일 오전 의정부 부근으로 추정된다. 중앙포토

일단 당시 상당수의 국군 부대가 육군본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자체 판단으로 경계 태세를 계속 유지했었다. 덕분에 제6사단 같은 경우는 초기 판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춘천대첩을 이끌기도 했다.

엄밀히 말해 38선을 지키던 5개 부대(서에서 동으로 17연대·1·7·6·8사단) 중에서 초전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부대는 제7사단뿐이었다.

38선에서 서울로 통하는 가장 가까운 축선을 담당하던 제7사단은 전쟁 발발 직전에 무려 4할의 병력이 영내를 벗어난 상태였다. 그래서 개전 첫날 보유한 화력까지 계량화하면 해당 지역에서 양측의 전력 차이는 5배 이상 벌어진 상태였다. 당연히 밀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6월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6·25 전쟁 보도에서 공개한 전쟁 당시 북한 군인. 사진 노동신문

지난해 6월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6·25 전쟁 보도에서 공개한 전쟁 당시 북한 군인. 사진 노동신문

이처럼 많은 병력이 소속 부대를 벗어났던 사실과 관련해 거론되는 주장이 농번기 일손 부족이다. 당시 농업은 남한의 최대 산업이자 생존 수단이었는데 대부분의 일을 인력에 의존했다.

특히 5~6월은 ‘고양이 손도 빌릴 때’라는 말처럼 가장 바쁜 시기여서 군도 도움을 주어야 할 처지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병사들의 외출 외박을 허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더욱 불가피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6ㆍ25전쟁 발발 직전에 촬영된 개성 인근 제1사단 전방 관측 진지. 많이 알려진 사실은 아니나 당시 군량미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중앙포토

6ㆍ25전쟁 발발 직전에 촬영된 개성 인근 제1사단 전방 관측 진지. 많이 알려진 사실은 아니나 당시 군량미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중앙포토

바로 군량미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당시 한국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안보적으로 상당한 위기 상황이었음에도 많은 장병을 병영 밖으로 내보내야 했던 커다란 요인 임은 틀림없다.

당시 6월은 온 국민이 굶주림에 배를 움켜쥐던 보릿고개 시기다. 식량 부족 고통은 군대라고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전쟁 발발 당시에 부대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보유 중인 군량미가 거의 바닥인 상태였다.

2005년에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간한 ‘6·25전쟁사 제2권’에 서술된 제6사단의 사례를 보자. 1950년 3월이 되자 알곡 보유는 전무한 상태였고 비상식량도 하루 치에 불과한 건빵 657상자뿐이었다. 여타 부대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지난해 9월 경기도 이천시 육군 특수전사령부에서 열린 '제72주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 국방부

지난해 9월 경기도 이천시 육군 특수전사령부에서 열린 '제72주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 국방부

따라서 위기가 다가왔음을 예측하였으면서도 당장의 호구(糊口)를 해결하라고 많은 병사를 병영 밖으로 내보내었다.

어쩌면 미스터리라는 것은 당시의 시대상을 오늘날 기준으로 보기에 생긴 것일 수도 있다. 전쟁 직전의 비상경계령 해제는 중대한 실수였지만 그 이면에는 이처럼 어려웠던 모습이 숨어있었다.

그런데 최근 휴가를 다녀온 장병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을 막기 위해 자가 격리 중에 받아 본 부실한 급식이 엄청난 논란으로 등장했다. 물론 본질적인 내용은 다르고 당국의 설명처럼 극히 예외적인 상황이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먹는 문제가 6·25 전쟁으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2021년에 벌어지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남도현 군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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